review/미디어아트 전시

컴퓨터그림, 상상할 수 있게된 개념을 보고…읽다._exhibition review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2. 1. 17:45


2006년을 마감하고 새로운 2007년을 맞이하는 시기에 빗트폼갤러리에서 C.E.B. Reas와 김수정의 컴퓨터 그림들을 보여주는 전시가 열렸다. 일종의 거부감을 자아내는 기계의 냄새를 풍기는 대신, 서정속에 역동성과 에너지를 담고 있는 이미지 하나하나에 머물면서 흥미진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올 것이 왔다!


프로세싱으로 만든 컴퓨터 그림

“새로운 상상력은, 곧 알고리즘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을 기구를 이용해 그림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능력은, 오늘날 의식을 그림으로 보는 것, 곧 미학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것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 [각주:1]『피상성 예찬』 중에서  -

전시를 보는 내내 나의 뇌리에는 빌렘 플루서라는 시대를 앞서간 한 디지털 사상가의 예언과 논의가 떠나질 않았다. 플루서는 컴퓨터예술이야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대변혁의 시대를 알려주는 중요한 징후라 했다. 이번 전시를 돌아보면서 프로세싱(Processing)이란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여기서 어떤 대변혁의 징후까지 찾을 수 있을까?

프로세싱은 시각적 문맥(visual context) 안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근본을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컴퓨터 언어 혹은 소프트웨어로 케이시 레아스(C.E.B. Reas)와 벤 프라이(Ben Fry)가 개발했다. 이번 전시에서 레아스는 프로세싱을 통해 만들어진 프로세스 시리즈를 프린트, 조각, 비디오 등의 매체를 통해 보여주었고, 김수정은 프로세싱을 활용한 소프트웨어 묘법을 통해 만든 독특한 선화(線畵)시리즈를 보여주었다. 레아즈와 김수정의 컴퓨터 그림들은 다음의 두 가지 측면에서 플루서가 예견한 디지털이 몰고온 변혁의 신호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플루서의 관점을 견지하자면, [각주:2]우리는 그림의 시대와 텍스트의 시대를 거쳐 테크노 코드를 통해 기술적 그림을 만들어내는 시대에 이르렀다.  그럼 기술그림의 시대에 우리는 어떤 변화를 맞이하고 있을까? 플루서에 따르면 컴퓨터 그림은 상상할 수 있게 된 개념들이다. 이제 인간은 개념을 상상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우리는 대수학적 방정식들, 기하학적 구조들, 미학적 범주들, 논리적 구조들을 그림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허용하는 기구들을 발명했고, 이제 그 기구를 통해 개념을 상상하는 것을 실행하고 있다. 프로세싱이라는 컴퓨터 언어를 통해 만들진 레아즈와 김수정의 작업들은 바로 개념과 논리가 그림으로 전환된 컴퓨터 그림의 예가 아닐 수 없다.

레아즈는 컴퓨터는 더 이상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상상을 확장시켜주는 협력자이고, 소프트웨어는 자신의 시각(vision)을 구축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매체라고 말한 바있다. 레아즈는 영어 텍스트를 프로그래밍 언어라는 기계언어로, 그것이 다시 시각적으로 시뮬레이션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인식 과정을 기계의 언어가 인식해 가는 과정의 여러가지 다른 관점들을 보여주고 있다. 김수정 역시 같은 맥락에서 컴퓨터의 수학적 논리가 프로그래밍 언어로 구현되는 선 긋기 이미지들을 통해, 수적 논리가 어떻게 이미지적으로 발현되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작업은 마법에 빠진 상상을 논리로 해체하고 단절시키는 대신, 상상안에 논리를 포용하여 개념을 상상하도록 하는 인간의 인식의 진화를 보여주는 새로운 컴퓨터 이미지들이라 하겠다.

즉 프로세싱이라는 프로그래밍 언어의 개발과 활용은 또 다른 측면에서 플루서의 예견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컴퓨터 시대에는 송출된 프로그램의 프로그래머가 우리의 경험, 인식, 가치판단 그리고 행위와 관련된 결정을 내리는 새로운 종류의 전체주의의 위협을 받게 될 것임을 경고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보제국주의는 기구들이 개별적인 인간들에 의해 자신들의 개별적인 목적을 위해 프로그램화됨으로써 해소될 수 있고, 그것을 실천하는 자들이 바로 컴퓨터예술가들이라고 보았다. 더욱이 그러한 종류의 프로그램을 프로그램화하는 그룹은 꼭 공간적 ·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있을 필요가 없고 개별적이 의도들이 종합되어 발전되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프로세싱이 지금처럼 국내는 물론 전 세계에 퍼져있는 미디어아티스트들에게 알려져 새로운 이미지와 사운드의 창작에 활용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컴퓨터를 통한 새로운 시각적인 결과물(청각적인 결과물은 물론)을 만들어내기 위한 비상업적인 오픈소스로서
http://processing.org을 통해 공유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수정은 자신의 소프트웨어 묘법을 설명한 글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선 긋기를 벗어나는데 10년이 넘게 걸린 것 같다고 말하면서, 그 역시 프로세싱이 비상업적이고 수평적인 네트워크를 강조하는 소프트웨어이기 때문에 자신의 소스코드들도 그림과 함께 실었다고 이야기했다. 이와 같은 움직임들을 본다면, 플루서가 컴퓨터 예술은 미래의 자유, 새로운 정치의 출발점이라고 한 대단한 찬사에 어느정도는 수긍이 갈 법도 하지 않을까?


자연의 모습이 아닌 역동적인 시스템을 담는다.

자, 그럼 레아스와 김수정의 이번 전시의 작품 안으로 좀 더 들어가 보자. 서로 다른 배경과 작품 세계를 펼처온 두 작가에게서 굳이 공통점을 찾아내려는 생각은 없지만, 이 두 작가의 작품을 관통하는 흐름을 찾아보도록 만드는 것은 이들의 작품을 하나의 전시 안에 조화롭게 담아낸 세심한 노력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인 것 같다. 전시를 보면서 작품 하나하나에 빠져들 수 있었던 까닭은 컴퓨터 그림 전시에 컴퓨터는 없었다는 점이다. 서두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컴퓨터의 차가움은 없고 서정적이고 따뜻한 정서가 밀려온다. 그럼 이들의 작업 안에는 무엇이 몽글몽글 피어나고 있는 것일까?





아직 개념을 상상하는 작가들을 쫓아가는데 역부족인 나는 작가들의 관심의 흔적들을 되짚어보면서 작품에 다가가 보기로 했다. 레아즈는 한 인터뷰를 통해 자신은 전통적인 예술에 관한 지식들을 컴퓨터과학으로부터 나온 개념들과 결융합시키는 작업을 진행해 왔다고 했다. 또한 인공생명, 인공지능, 로봇, 창발성의 원리 등에 관한 관심들은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전기장치를 설계하는 법을 배우게 하는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레아즈는 그의 석사논문에서 키네틱아트를 다루면서, 특히 자율성을 갖는 조각의 물리적 현전에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관심들은 소프트웨어가 오브제와 환경속으로 통합시키는 현재의 작업을 어느 정도 예상케 하는 부분이다. 재미있는 공통점은 김수정 역시 키네틱 아트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작품을 보여줘 왔는데, 인간의 의지보다는 자연발생적인 에너지의 우연성을 작품의 구성요소에 수용하고 포함하여 환경과 어우러질 수 있는 작업을 통해 자연을 디지털로 재해석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레아스와 김수정은 자연을 디지털적인 방식으로 표상하고자 하는 공통된 관심과 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것이 바로 이번 전시에서 두 작가의 작품을 너무나 조화롭게 포괄할 수 있는 맥락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프로그래밍을 통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작가들은 과거의 작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연과 세계의 모습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고 운용하는 질서와 원리를 표상하고 있다. 사물의 외형이 아닌 내부에 역동적인 시스템을 담아내려는 레아즈의 시도와 자연을 디지털로 다시 해석하고자 하는 김수정의 작업속에서 이제 컴퓨터 그림속에 담길 새로운 자연과 세계의 모습들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은 이미지로 뒤덮여 있다. 단 새롭게 등장한 그림들은 과거와 다른 새로운 언어로 만들어진 그림이란 점에 주목하자. 새로운 그림으로 새로운 자연과 세계를 담아내고 만들어내는 컴퓨터 예술가들의 행보에 더더욱 주목하자. 이제 새로운 컴퓨터 그림을 보고 읽어낼 준비가 되었나? 이제 올 것이 왔다!


  1. 빌렘 플루서, 『피상성 예찬 - 매체 현상학을 위하여』, 김성재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4, p. 278. [본문으로]
  2. 플루서는 새롭게 등장하는 매체는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의 코드를 변화시키고 이러한 코드의 변화는 우리의 사고와 인식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에, 인간은 그림의 세계에서 자신의 환경속에서 방향을 설정하는 것을 허용하는 상상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후 문자가 발명된 텍스트의 시대에는 자신의 상상을 비판할 수 있는 개념력을 소유하게 되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