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미디어아트 전시

기억의 주체는 누구인가 : Mioon / 기억극장 _exhibition review

yoo8965 2014. 6. 16. 23:39


기억의 주체는 누구인가? _매체에 의해 전복된 주체의 기억
Mioon / 기억극장 : <Auditorium(Template A-Z)>과 <Set>을 중심으로




기억에 앞서.

우리가 무언가를 기억하려 할 때, 과연 떠올려진 기억-이미지는 주체로부터 파생된 것일까,

아님 기억이 주체를 선택하여 실체화된 것일까?



   독일의 생리학자 해링 Hering에 따르면, 우리는 ‘기억의 안경을 통해서’ 그 대상을 본다. 따라서 이미 아는 대상을 다시 보거나 ‘다시 본다고 믿을’ 때마다 그것이 되살아난다고 말한다.[각주:1] 우리의 기억은 불완전한 동시에 불규칙적으로 소환된다. 이는 ‘기억’이란 프로세스가 인식 과정에 후행하기 때문이며, 선행되는 인식의 과정에서 이미 임의성과 자의성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식을 기반으로 하는 기억은 완전한 형태로 소환될 수 없으며, 그 과정 또한 규칙으로 묶어두기 어렵다. 만약, 이러한 과정을 보편적 흐름으로 귀결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인식과 기억을 지배하는 우리의 감성/감정과 충격에 대한 논의를 우선 진행해야 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정확하게 논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특수한 감성/감정은 결국 개인의 문제로 귀결되며 보편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에게 기억이란 스스로의 내재적 규칙에 의거한, 따라서 타인이 보기에는 충분히 불규칙적 알고리즘으로 인식될 수 밖에 없다. 기억이란 프로세스를 우리의 지각 작용에서 미세하게 분절시켜보면 기억과 상기, 인식 작용으로 나뉘는데 인간은 이러한 불완전성과 불규칙적 기억, 그리고 기억의 분절 형태를 보조하기 위하여 매체를 사용한다. 사진기와 영상 매체는 우리의 시각적 기억을 효과적으로 매개했고, 축음기와 같은 장치들은 청각적 이미지를 재현할 수 있었다. 물론, 매체의 발명 동기가 기억의 보조적 수단으로서만 파악될 수는 없겠지만 기억의 측면으로 제한시켜 보자면 매체는 인간 기억에 대한 완전한 기술적 지지체로서 기능해 왔다.


카밀로(Giulio Camillo)의 '기억극장(Theatro della Memoria)' 설계도



   뮌의 개인전 <기억 극장>은 과거로부터 작가들이 실험해 온 매체에 의한 지각과 기억에 대한 종합적 리포트이다. 코리아나 미술관, ‘Space*C’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번 전시는 작가의 지난 작업들에서 제시되었던 ‘주체와 타인들과의 극장형 기억’을 보다 총체적인 예술적 지평으로 확장한다. 전시의 제목은 길리오 카밀로 Guilio Camillo 가 16세기 초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궁정에 세운 목조(木彫) 극장의 이름인 ‘기억 극장 Theatro della Memoria’ 에서 차용한 것인데, 이 극장은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했던 '비학(秘學)'을 토대로 그간 인류가 축적해온 우주의 비밀에 대한 지식을 새로이 체계화한 공간이었다.[각주:2] 이 공간은 과거의 유산을 모아놓은 ‘쇼케이스 Showcase' 및 ‘진열장 Cabinet'의 발전적 형태로 이해할 수 있지만, 기록의 대상과 방식에 관한 접근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공간이 무대와 관람석이 뒤바뀐 구조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구조는 관객과 배우의 위상(位相)적 전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기억 혹은 데이터가 그러한 위상적 전복의 주체로서 등장한다는 점에서 주목해 볼 만하다. 이러한 형태는 뮌에게 있어서 이전 작업들에서부터 나타났던 형태이다. 홀로그램에 의한 환영적 이미지를 제시했던 <홀로오디언스 Holoaudience> 2005 나 확장적 형태의 비디오 스크린을 이용하여 작품을 구성했던 <관객의 방백 Aside of Audience> 2008 이 그것이다.


<홀로오디언스 Holoaudience>, holograms, motors, aluminum frame, sound, 2005 


   <홀로오디언스>에서는 환호를 보내는 작품 속 가상의 관객이 등장하여 실제 관람객에게 일종의 무대 속 황홀경을 경험하게 만든다.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사이의 위상(位相)은 예술에 있어 이중적 주체의식 [작품에 있어 관객은 영원한 타자이며, 관객에 있어 예술 작품은 단지 대상일 뿐]을 공고하게 만들어 왔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관객은 스스로를 둘러싼 가상 관객의 배치를 통해 작품과 관객 사이의 전복적 관계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홀로오디언스>에서의 관객이 상징적 존재로서 가상적으로 나타났다면, <관객의 방백>의 관객은 더 이상 상징적 차원으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 작품에서도 관객은 스크린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따라서 존재론 적으로 보자면, <홀로오디언스> 및 <관객의 방백>의 관객은 동일하다. 그러나 <홀로오디언스>의 관객이 일방적으로 관객을 환대하는 존재로서 홀로그램 영상으로 재-매개되어 나타났다면, <관객의 방백>에서의 관객은 매우 현실적인 모습으로 투명하게 매개되어 관객과의 현실적 공명을 이루어낸다.



<관객의 방백 Aside of Audience>, multi-channel screen, computer, projectors, 18min, 2008


   그러나 이번 전시의 주요 작품인 <오디토리엄 Auditorium(Template A-Z)>은 앞서의 작품들보다 전시 제목인 ‘기억 극장’이라는 주제와 연동하여 더욱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이 작품은 다섯 개의 거대한 캐비넛들로 구성된 작품이다. 다섯 개의 캐비넛들은 반원 형태의 구조로 배치되어 있으며, 각각의 캐비넛 속에는 기억을 소환하기 위한 다양한 오브제들이 들어차 있다. 마치 카밀로의 기억 극장의 구조를 전자 매체로 재현하는 듯 보이는 이 작품은 발광되는 캐비넛 속 조명 장치에 의해 그림자들로 공간 전체를 가득 채운다. 캐비넛 속의 오브제들은 작가에 의해 배치된 지극히 개인적인 오브제들일지 모르지만, 그 오브제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자 이미지는 빛과 캐비넷에 부착된 불투명한 플라스틱 스크린에 의해 굴절되고 왜곡되어 보편적 기억을 소환하는 환영적 이미지로 나타난다.


<오디토리움 Auditorium(Template A-Z)>, cabinets, objects, lights, motors, 2014


이러한 환영적 이미지가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오브제 자체가 이미지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닌 그것이 그림자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인데, 그림자 이미지는 우리의 지각 과정 속에서 과거의 기억과 결합하여 일종의 보편적 오브제로서 인식된다. 이러한 효과는 인간 기억에 대하여 기술적 지지체로 기능하는 매체의 효과를 상기시킨다. 우리의 기억은 어느새 매체에 의해 기록되는 것을 넘어 생성되며 소환될 뿐만 아니라 변형되고 소멸된다. 결국 인간의 기억은 매체 의존적 과정을 거쳐 우리들의 인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지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관객이 경험하는 이미지는 결코 관객들 스스로에 의해 소환된 기억에 관한 이미지는 아니지만 선험적 대상으로 간주된다. 즉, 어딘가에서 마주한 듯한 혹은 경험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미지는 주체의 실존적 기억이 아니지만 우리는 매체에 의해 보편적 인간의 삶의 기억/이미지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이미지를 무의식적으로 스스로의 기억 이미지로 동화시켜 버린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봐야 하는 지점은 매체에 의한 기억 소환의 측면이 아닌, 소환된 기억의 주체가 누구인가? 라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카밀로의 기억 극장의 구조처럼, 이 작품 또한 기억해야 할 대상과 소환되어야 할 장소가 뒤바뀌어 있다. 즉, 기억이 오히려 소환되어야 할 주체를 선택하는 공간적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관객의 신체가 직면하는 공간은 작품을 마주하는 위치로서의 공간이 아닌, 전복되어버린 기억의 주체로서의 상황적 공간이 된다.[각주:3]


<오디토리움 Auditorium(Template A-Z)>, 세부


   뮌이 제공하는 이러한 매체 의존적인 기억의 소환 작업은 <Set (American wooden house)>에서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이 작품은 각기 다른 영상 스트립들이 영상 사이의 간극과 더불어 제시되고 있는데, 5초간의 화면의 암전을 통해 작품의 중요한 단서를 관람객에게 노출한다. 왜냐하면 영상이 투사되는 벽면에 야광 안료로 그려진 회화적 이미지가 영상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이미지로 인식되는 지각적 프로세스를 관람객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뮌은 기원전 이집트에서 사용했던 ‘팔림세스트(palmipsest)’ 기법과 유사하게 이전의 영상/이미지 위에 새로운 이미지를 덧씌우는 방식으로 작품을 구성했는데, 양피지 위에 새로운 텍스트가 이전의 텍스트를 숨기지 않은 채 보이게 하여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팔림세스트 효과와는 달리 <Set>의 경우, 현재의 이미지를 과거의 기억에 의존해 인식하는 인간 사유의 프로세스를 매체의 현상과정으로 유비한다.


<셋 Set (American wooden house)>, HD video, 10min, fluorescence painting, 2014


<Set>의 작품 구조는 카메라 옵스큐라를 통해 매체적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를 손에 넣는 과정과 유사하다. 우리가 사진기를 들고 피사체를 선택하여 셔터를 누르게 되면, 사물의 이미지는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필름에 맺히게 된다. 필름에 맺혀진 상은 다시 현상과 인화의 작용을 거쳐 한 장의 이미지로 현재화된다. 즉, 필름에 맺혀진 이미지는 빛이 만들어내고 매체에 의해 매개된 것인데, 이 작품은 이러한 과정을 다시 해체하여 우리 앞에 풀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사진기가 우리에게 기계적 프로세스를 통해 현상된 이미지를 제공했다면, 이 작품에서 우리는 자신의 지각을 통해 뇌에 착상된 이미지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차원은 신체를 작품의 구조에 포함시켜 미학적 구성요소로 만들고자 했던 과거 실험적 예술 작품의 전략을 따르는 듯 보인다.[각주:4][각주:5] 미술사가인 조나단 크레리 Jonathan Crary 는 플립북과 같은 ‘영화 이전의 precinematic’ 장치를 언급하며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신체의 개입을 설명한다. 손으로 페이지를 넘겨야 하는 플립 북의 경우 이미지를 연결시키기 위해 직접적인 신체의 개입을 요구하는데, 이로부터 촉각적 경험이 획득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은 직접적인 신체의 개입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다만, 영상 이미지 사이의 암전과 회화적 안료 이미지를 통해 우리의 지각적 작용을 활성화시킨다.[각주:6]

   그러나 이 작품이 근본적으로 제기하는 문제는 지각의 활성화가 아닌, 활성화를 위한 작품의 선천적 조건에서부터 발생한다. 베르그송은 영화에 관하여 단편적 이미지들이 매체에 의해 연속의 환영을 만들며 운동을 재구성한다고 언급하며 이를 ‘영화적 환영 Cinematographic illusion’이라 명명했다.[각주:7] 그러나 베르그송에게 있어 영화적 환영을 불러일으키는 주체가 결국 이미지와 이미지의 정지된 상태를 운동시키는 인간의 지각이라는 점에 반하여 이 작품에서 그러한 운동성은 야광 안료로 그려진 회화적 이미지에 의해 만들어진다. 실제로 암전 상태에서 눈에 보이는 [야광 안료에 의한] 이미지는 바로 직전에 투사되었던 영상에 의존하여 생성된다. 따라서 영상의 흔적이 관객에게 자의적으로 남는다기보다는 작가가 만들어놓은 매체적 기억으로 현상되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은 <오디토리엄>에서도 언급되었던 기억의 주체에 대한 문제와 연결된다. 물론, 그러한 매체적 기억이 파생되는 프로세스는 상이하다. <오디토리엄>에서의 기억-이미지는 우리의 지각 작용을 거쳐 매체적으로 공유된 기억들의 소환으로 나타났다면, <Set>에서는 직접적으로 매체가 이미지를 조작하는 장면에 관객을 동참시키는 동시에 그것을 주체의 기억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이로부터 뮌의 <기억극장>은 매체에 의한 기억을 환기시키는 장치로 작동한다. 매체는 이미 인간에 대한 기술적 지지체로 기능한다.[각주:8] 그리고 기억 또한 매체 의존적 특성을 보이게 된다. 이제 우리는 인간의 사유가 매체와의 공진화 관계 속에서 발전적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그러한 인간의 기억 및 사유의 과정과 매체적 프로세스의 유기적 통합을 시도해야 한다. 이미지가 주체에게 체화되어 우리에게 기억되는 것처럼, 매체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매개화의 과정으로부터 이미지의 신체화를 촉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글. 유원준 [앨리스온 편집장]



  1. Karl Ewald Hering, Grundzüge der Lehre vom Lichtsinn, p.8 [본문으로]
  2. 전진성, <박물관의 탄생>, 살림출판사, 2004, p. 27 [본문으로]
  3. 메를로 퐁티는 신체의 도식을 설명하며 신체가 지닌 공간성은 외부 대상의 공간성 또는 ‘공간 감각’의 공간성처럼 위치의 공간성이 아니라 상황의 공간성이라고 설명한다. 메를로 퐁티, 류의근 역, <지각의 현상학>, 문학과 지성사, 2002, p. 168 [본문으로]
  4. 로잘린 크라우스 Rosalind E. Krauss 는 제임스 콜맨 James Coleman 의 작품과 크리스 마르케 Chris Marker 의 작업을 분석하며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분절적인 요소에 의해 관객은 신체를 작품 속으로 투영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녀는 이러한 작업을 설명하며 포스트 미디엄의 조건을 기술적 지지체로서의 매체로 서술한다. [본문으로]
  5. 지각적 작용이 발생하는 것을 신체화의 일부로 판단하는 것은 베르그송의 이론에 근거한다. 베르그송은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을 일종의 이미지로 보았다. 그는 이러한 세계의 이미지들을 특권화된 이미지인 신체를 통해 지각하고 감각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Henri Bergson, 박종원 역, <물질과 기억>, 아카넷, 2005, pp. 37-41 [본문으로]
  6. 퐁티는 신체를 지각된 세계에 관한 ‘이해’의 일반적 도구로 인식하는데, 이로부터 나의 신체는 표현의 장소로서 다양한 감각들이 서로를 잉태하는 장소가 된다. 메를로 퐁티, 같은 책, p. 358 [본문으로]
  7. 베르그송은 영화가 재현하는 운동-이미지는 운동을 직선상의 점들의 통과로 이해하는 고대적 사유방식과 다르지 않다고 인식한다. 반면, 들뢰즈는 영화 이미지가 사유에 의해 운동성이 부가되는 것이 아닌, 직접적으로 운동하는 이미지와 운동 그 자체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우리가 영화를 통해 보는 것은 단편적 조각들 사이의 이미지이지, 그 조각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각들 사이의 이미지는 우리의 지각과 사유에 의한 것이 아닌 영화적 장치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을 참조하기 바란다. Henri Bergson, 황수영 역, <창조적 진화>. 아카넷, 2005 와 Gilles Deleuze, 유진상 역, <시네마 I : 운동-이미지>, 시각과 언어, 2002 [본문으로]
  8. 이러한 기록 매체는 당연하게도 인간에게 있어 기술적 지지체로서 기능하게 되는데, 우리가 이렇듯 자연스럽게 매체에 의존하여 스스로의 기억을 소환하는 동안, 우리의 기억들은 매체의 형식에 따라 그 형태를 자연스럽게 변화시키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인간의 기억이 자의적 선택에 의한 의식-집중적 과정이라면, 매체의 기억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음성 기록은 내가 기억해야할 사운드만이 아닌, 우리가 소음이라 일컫는 종류의 모든 음을 기록하며, 사진과 영상 이미지는 주체가 선택하는 대상을 뛰어넘는다. 물론, 이러한 차원에서 사진과 영상은 우리의 의식-기억의 흐름과 유사한 대상의 선택과 집중의 매커니즘을 갖고 있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해보면, 선택된 대상은 철저히 객관화된 시선 속에서 머무르게 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