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e!/art & news

Fringed with Jo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6. 9. 6. 20:42

아마도예술공간에서 '로와정'의 개인전 <Fringed with Joy>(2016)가 열리고 있습니다. 아마도예술공간의 물리적 구조를 바탕으로 ‘ ‘놀이그리고 ‘자화상이라는  개의 섹션으로 구성된 본 전시회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따라가 보시길 바랍니다. 







<Fringed with Joy>

오프닝: 2016년 9월 5일 (월), 저녁 5시, 아마도예술공간 1층 Bar
전시기간: 2016년 9월 5일 - 10월 2일 / 화요일 - 일요일 / 11.00 am - 7.00 pm / 월요일 휴관

전시장소: 아마도예술공간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683-31)

전시작가: 로와정 


 

로와정은 정현석, 노윤희 명으로 구성된 작가 듀오이다. 로와정은 명의 작가에 의해 탄생한 가상의 인격체이지만, 동시에로와정이라는 이름 아래 작가로서 독자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실제적 존재이다. 이러한 태생적 조건에 의해 로와정의 실체는 필연적으로 액체와 같이 유동적이고 가변적이다. 내재적으로 타자의 눈을 항시 지니고 있는 필연적 운명으로 끊임없이 내부적으로 서로를 견제하고, 비판하며, 그렇게 객관적 시선을 담보하는 과정에 의해 새롭게 형태를 형성하게 되는 존재라 있다.


그들의 작업에 대해 간결하게 표현하자면관계또는관계로부터라고 있다. 작게는 로와정을 구성하는 사이의 관계로부터 시작하여, 조금 넓게는 로와정과 주변의 관계 그리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사회와의 관계에 이른다. 이러한 관계는 사이의 섬세한 조율에 의해 시각화되며, ‘이라는 구조에 의해 태생적으로 가진 타자의 시선을 통해 사적이면서 동시에 객관적이고,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이며, 무엇보다 내밀하지만 동시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독자적 시선으로 드러난다.


로와정은 <Fringed with Joy>(2016)에서 아마도예술공간의 물리적 구조를 바탕으로놀이, 그리고자화상이라는 개의 섹션으로 전시를 구성한다. 여기서이란 학습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우리의 사고체계, 사회적 규범과 규율, 통념에 대한 은유이며, ‘놀이이라는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가 잊어버린 어떤 본질적 유희에 대한 표현이다. 그리고 그러한놀이 사이에 위치한자화상 방향을 잡고 불안하게 요동하는, 한없이 취약한 개인의 모습이다. 전시는 이렇게 개의 섹션으로 나뉘어 드러나지만, ‘놀이, ‘놀이자화상으로, ‘자화상 긴밀하게 엮임으로써 과거를 추억하기에 상실감을 지닌 인물이자 보편성의 논리 속에 개성을 잃어가는 인물이며, 순수한 본질적 유희를 추구하지만 고정된 사고로부터 자유로울 없는 현실 인물인 우리의 모습을 그려낸다.




<Fringed with Joy> 전시 이미지  

 



Fringed with Joy   환희의 테두리 

/ 단단하고 딱딱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보다 유연하고 질긴 것은 없다. 틀이라는 이름은 허용하지만 명확하게 고정된 하나의 실체로 언급할 수는 없다. 투명하고 무형인 이것은 규칙을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오히려 규칙을 공고히 하기 위해 형태와 모습을 유연하게 바꾼다. 어떠한 의심도 허락하지 않고, 서서히 눈에 보이지 않게, 하지만 최적의 방식으로 이미 대상을 옭아맨 틀은 외부의 침투를 효과적으로 보호해내지만, 동시에 안에 갇힌 대상의 완전한 해방을 불가하게 한다. 만약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움을 갈망한다면 대상은 전체로부터 소외되거나 도태되며, 어떤 공동의 심지가 결여된 광인으로 낙인 찍힐지도 모른다. 틀은 사회를 보편성의 논리 하에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리게 하는 규칙이며, ‘합리라는 이름으로 외의 것들을 인정할 없게 만드는 기준이고, 현상의 본질에 다가서기 이전에 작동하는 고정관념이나 선입견과 같은 것이다. 어느 순간 그것은 내면화되어 신체를 관통하고 있고, 그렇게 어느새 틀에 들어맞는 우리가 만들어진다. 개인에게 침투한 틀은 결국 개인이 아닌 다수, 사회의 어떤 법칙을 유지하고자 존재하는 것이며, 그렇게 다수 개인의 의미는 서서히 허물어져 가고 최초의 모습은 삭제되어 간다.


놀이 / 자유롭고 자발적이며, 고정적이지 않고 유동적이다. 자발적인 행위와 자유라는 놀이의 본질은 즐거움을 담보한다. 상상적 영역과 본능적 차원의 것이고, 비일상적이며 비합리적이다.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주도하에 즐거움을 추구하는 그것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갈망하던 본질적 유희에 가깝다. 놀이는 기존의 일상과 삶의 방식으로부터 탈주를 꿈꾸게 하기에 실제의 삶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일시적 활동이다. 일상의 틈새를 비집고 잠시동안 몸의 언어, 감성의 발현, 정신의 각성을 유도하는 그것은 엄숙함보다는 유쾌함을 동반한 완전한 휴식이거나 우리의 삶을 다른 부분에서 풍요롭게 만드는 순간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통해 비일상성, 탈일상성의 순간을 경험하게 하는 유희의 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상으로부터 벗어난 완전한 유희의 순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색이 바래어 결국 도달할 없는 순간이 되어간다. 그렇게 놀이는 시간이 지나 이미 경쟁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본질적인 유희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자화상 / 자신에 대한 한없는 애정과 연민의 시선을 담고 있다. 과거와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없는 자신은 현실의 자신을 마주하며 비애에 잠긴다. 하지만 한편으로 내일이면 과거가 되어버릴 오늘의 모습을 끝없는 애정으로 보듬기도 한다. 그렇게 자화상의 표정과 몸짓에는 우울함과 환희의 정서가 동시에 내비친다. 고정된 이미지이지만 정지해 버린 시공간의 내가 아니다. 모습형태 너머의 과거에 대한 의식과 현실에 대한 의식이 합쳐져 생겨난 사건으로서의 시공간이다. 도망칠 없는, 끊임없이 마주해야 하는 현실에 대한 몸부림이며, 이상과 현실의 간극에 존재하는 정서적 괴리의 노출이자, 과거를 그리워하는 아련함이기도 하다. 성찰적이며 자기 고백적인 모습이며 타자의 시선을 요구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렇게 자화상의 모습을 응시하는 타자의 시선은 굴절되어 대상을 둘러싼 사회와 환경으로 향하고, 그렇게 자화상에 남겨진 이미지는 현실을 비추는 신체가 된다.


틀과 놀이, 그리고 요동하는 자화상 / ‘놀이그리고자화상 각자의 얘기를 하면서도 서로의 주변을 배회한다. 셋은 유기적으로 엮이며 마치 목적이 다른 사람이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무언가를 지탱하기 위해 공존하듯 하나의 모습을 그려나간다. 순수하고 본질적인 유희로서의놀이 추구하는 우리의 모습은 학습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사고체계, 사회적 규범과 규율, 통념을 은유하는 귀속되지 않은 상태이다. 하지만 이미 신체를 잠식하고 사고와 시선의 자유를 빼앗은 우리의 기대를 외면하듯 완전한 유희인놀이 영원히 도달할 없는 영역의 것으로 유보한다. 결국, 사이에서 나아갈 방향을 잃어버린 자화상은 불안하게 요동할 뿐이다. 어느새 틀에 익숙해져 버린 우리의 신체는 자체로 다른 틀이 되어가고 범위를 갱신해 나아간다. 그렇게 틀은 비대하게 부피를 키워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속을 채우는 것은 끊임없는 결여이다. 그렇게 틀과 놀이, 그리고 사이에 위치한 자화상은 결여의 자화상을 그려나간다. 결국, 틀과 놀이의 관계 속에 생성된 자화상은 과거를 추억함으로써 상실감을 가진 인물이며, 보편성의 논리 속에서 개성을 잃어가는 인물이자 본질적 유희를 추구하지만, 그로부터 자유로울 없는 인물의 모습이다. 하지만 속이 덩치만 키워갔기에, 그래서 아직은 채워지지 않은 속에 남겨진 여백에 기대어, 다른 틀이 우리가 아닌 변화의 가능성을 지닌환희의 테두리 (Fringed with Joy)’ 되는 순간을 희망한다.

 

( / 김성우, 아마도예술공간 책임큐레이터)






* 자료출처: http://amadoart.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