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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사진작가 데이비드 슬레이터는 원숭이가 자신의 카메라로 찍은 셀카 때문에 논란의 중심에 섰다. 문제의 시작은 위키미디어에 사진이 공개되면서부터다. 이 사진은 무료이용이 가능했고 데이비드는 수입을 뺏긴다고 주장하며 당장 사진을 내려달라고 위키미디어에게 요청했지만 위키미디어는 거부한다. 데이비드가 아닌, 원숭이가 사진을 찍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동물보호단체PETA가 개입하면서 더 복잡해진다. PETA가 원숭이 셀카의 저작권은 원숭이에게 있다고 샌프란시스코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원숭이가 찍은 셀카는 과연 누구의 저작물일까?


<데이비드 슬레이터와 셀기꾼 원숭이 나루토>


결론적으로 법원은 원숭이의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PETA와 데이비드 양측은 데이비드가 원숭이 셀카로 발생하는 수익의 25%를 원숭이를 보호하는 일에 쓰기로 합의하며 마무리 되었다. 이들은 공동성명을 통해 이번 사건은 인간이 아닌 동물을 위한 법적인 권한을 어디까지 확장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관심을 일으켰다고 발표했다. 저작권의 정의가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인 저작물에 대한 배타적 독점적 권리라면, 곧 도래할 로봇의 시대에 이 정의는 얼마나 유효할 수 있을까? 로봇의 예술은 어디까지 인정 받을 수 있을까?


로봇예술과 로봇의 예술은 엄연히 다르다. 전자는 작가가 로봇의 구조적 공학적 미를 예술로 승화한 작품이라면 후자는 로봇이 인간의 재현방식을 모방한 2차 예술활동이다. , 로봇이 인간의 드로잉 방식을 모방하여 초상화를 그린다면 그것은 로봇의 예술이다. 문제는 그 초상화가 로봇을 만든 작가의 작품인지 로봇의 작품인지 애매모호하다는 점이다. 누구의 작품인지 권리를 따져 묻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과연 로봇의 작품은 예술로 인정 받을 수 있을까? 그들은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있을까?


<패트릭 트레셋, 폴이라는 이름의 다섯 로봇> 

 

아직까지 로봇이 만든 작품을 예술로 인정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로봇의 작품이 예술로 인정받기에는 현재 조악하다. 다만 로봇, 그 자체를 예술로 인정하고 그 로봇을 만든 작가를 예술가라고 부를 뿐이다. 로봇이 만든 작품에는 관심이 없다. 고흐 뺨을 두 세대 칠만큼 뛰어난 그림을 그리는 로봇이 등장해도 아마 우리의 반응은 이럴 것이다. “아니, 이렇게 그림 잘 그리는 로봇을 만든 작가는 누굽니까? 당신은 정말 위대한 로봇 예술작가입니다.” 아직 우리가 로봇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은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반응은 로봇이 아직 인간의 대리인이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로봇은 인간의 자아와 같은 주체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영혼이 없다라는 고전적인 레토릭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 말은 예술에서 엄격하게 적용된다. 이러한 논쟁은 사실 100년 전에 이미 선행되었다. 마르셀 뒤샹이 공장에서 찍은 변기를 들고 <>이라는 타이틀을 붙였을 때 사람들은 그걸 천박하다고 여기며 예술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 작품에는 예술가의 장인정신과 창조적인 테크닉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뒤샹의 <> 20세기를 대표하는 예술로 인정받는다. <>이 예술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뒤샹의 철학이 작품에 깃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외관상의 특징만으로 작품의 가치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깃든 의미와 철학이 곧 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기준에서 사실상 로봇의 작품은 예술로서의 가치를 상실한다. 로봇의 작품은 작가가 구상한 알고리즘으로 작품을 대리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을 통해 로봇의 주체적인 의미가 깃든 작품을 만든다면 그것은 예술이 될 수 있을까?


<마르셀 뒤샹과 그의 샘>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이 이후, 대부분의 워딩은 구글 딥마인드가 이세돌을 이겼다.’가 아닌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겼다.’였다. 이 워딩이 주는 메시지는 알파고가 구글 딥마인드에 종속된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주체성을 띈 존재로 우리에게 받아들여 졌다는 뜻이다. 알파고의 플레이는 인간의 영역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독창성을 뛰어 넘은 독창성이었다. 다시 말해, 인간이 개입하지 않은, 더 정확히 말하면 개입할 수 없는 주체성으로 인간을 이긴 것이다. 이를 통해, 인공지능 로봇은 그 로봇을 만든 개발자의 존재는 지워지고 그 자체의 존재로 인정 받게 될 날이 머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인공지능 로봇의 예술이 본격적으로 도래하면 기존 예술의 지평은 모두 허물어지고 새로운 예술 토대를 재건해야 할지도 모른다. 과연 누가 인공지능 로봇의 예술을 가치 판단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 때문이다.

 

인간이 로봇의 예술을 감상할 수는 있지만 비평의 방법은 달라질지 모른다. 아서 단토가 예술의 종말 이후, 예술이 기존의 예술사적 맥락에서 벗어나 작품 자체의 내러티브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을 때와는 또 다른 패러다임이다. 인간은 로봇의 예술이 구현하는 내러티브에 집중할 수 없다. 인간의 예술을 분석하여 쌓은 기존 예술 언어 위에서 로봇의 예술을 분석한다는 것은 마치 호환이 안 되는 운영체제로 호환을 시도하는 것과 같다. 비평을 시도한다고 해도 피상적이다. 그들의 언어와 우리의 언어는 다르다. 알고리즘을 번역 하여 그들의 예술을 이해해야 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예술을 비평하기 위해 비평 컴퓨팅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할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그들의 예술을 비평하기 위해 프로그램이 비평가를 대체하는 상황이 오는 것이다.

 

<이세돌과의 대결에서 인정 받은 알파고 > 


미학자 진중권은 인공지능의 예술은 알고리즘이기에 독창성과 반한다고 말한바 있다. 하지만, 전통적인 인간의 수를 파괴하는 독창적인 수로 이세돌을 제압하는 알파고를 통해, 알고리즘이 독창성과 반한다는 그의 주장은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공지능 스스로 알고리즘으로 의미를 창출하고 내적 원리를 만든다면 창조성과 거리가 먼 얘기로 치부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렇다면, 다시 맨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로봇의 예술은 어디까지 인정 받을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질문은 하나 마나한 무의미한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예술은 각 시대의 서로 다른 믿음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로봇의 예술이 예술로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미래에는 자연스럽게 쌓인 인공지능 문화의 토대 위에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예술의 인정 여부는 현재로 성급하게 소환하여 다뤄야 할 문제라기 보다, 인공지능 발전과 더불어 우리가 그 기술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서 충분히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글.임태환(앨리스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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