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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laystayion #6] 서사적 이입(동일시)과 수행적 단절(대상화)

aliceon 2019. 4. 29. 22:26

서사적 이입(동일시)과 수행적 단절(대상화)

 

게임의 태동기를 제외하면, 게임에서 이야기는 정도의 문제였을 뿐, 언제나 중요한 요소로 등장했다. 장르에 따라 그것을 배경으로 부르든 세계관이라고 부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현실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며 개인과 집단의 역사를 만드는 것처럼 게임에서 역시 비슷한 과정과 서사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게임의 역사에서 RPG가 언제나 주류장르였던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인간행위의 모방은 무엇보다 서사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모든 예술이 거쳤던 길을 다시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똑같진 않았다. 행위를 모방한다고 해서, 게임은 소설이나 영화가 하는 것처럼 하지 않았다. 다른 것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 있었던 것이다. 게임에서 수용자는 수용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로 기능한다는 것. 여기서 전통적 수용이론이나 서사이론은 무력해지며, 다른 예술이론에서 등장하지 않았던 놀이론이 등장하는 이유다. 캐릭터의 기능도 기존의 장르와 제법 차이가 생긴다. 캐릭터는 전통적으로 수용자가 동일시하는 장치로 기능했고, 오랫동안 그렇게 해석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동일시할 때 주체가 정화를 하든 이데올로기가 침투를 하든 기본뼈대는 동일하다. 캐릭터는 수용자가 (게임을 포함하는) 예술이 구축하는 미적인 가상에 입장하는 진입로인 것이다. 게임은 이 전통적 장치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온전히 작가가 짜놓은 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무엇을 기입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당장 캐릭터를 선택할 수 있는 RPG를 한다고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캐릭터를 선택하고 구성할까. 단순히 자기를 이입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름부터 용모까지 자기가 꿈꾸는 자기를 캐릭터에 집어넣는 경우다. 아니면 욕망하는 타자를 구성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게임에서 성차와 관계없이 아름답게 ‘제작’한 이성 캐릭터를 전시하는 행태는 유별난 게 아니다. 장르와 인터페이스에 따른 차이도 고려해야 한다. 1인칭 시점을 고수하는 경우는 ‘나는 너’라고 강력하게 호명한다. 3인칭 시점을 유지하는 경우는 뒷모습일지언정 언제나 응시할 ‘나 아닌 너’가 존재한다. 흥미롭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한 것은 이 과정에서 무수한 변수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성차 인종 계급 계층 등, 온갖 사회적 요인들이 개인의 욕망과 얽히고 섞이며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놓는다. 플레이스테이션은 이 ‘여지’를 탐색해 볼 것이다. 여러 게임에서 캐릭터를 어떻게 선택하고 어떻게 대하는지 플레이어의 입장과 해석자의 입장에서 몇 가지 단서를 찾아볼 것이다.

 

 

개요

  • 일시 : 2019.05.03(금) 6시 30분 
  • 장소 : 핸드메이드 유스페이스점(031-628-1004),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대왕판교로 660 유스페이스1 B동 B117호 
  • 주최 및 진행 : 더플레이(the play)

프로그램 구성

  • 18:30 ~ 19:00 | 김상우_서사는 어떻게 수행과 충돌하는가: <로스트아크> 섬퀘스트의 짤막한 분석 
  • 19:00 ~ 19:30 | 허대찬_인간과 기계, 당신은 어디에 서 있나요: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에 대해서
  • 19:30 ~ 19: 40 | 휴식
  • 19:40 ~ 20:00 | 질의응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