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미디어아트 전시

Je suis I'hommelette_노진아 개인전 _exbition review

알 수 없는 사용자 2005. 3. 12.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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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공간 루프_2005.1.28~3.4

거울 속에는 내가 있다. 거울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왜나하면 거울 없이는 나는 내 모습을 온전히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울 없이 혼자서 내가 확인할 수 있는 나의 모습이란 고작 팔, 다리, 가슴과 발 따위의 둑뚝 끊어진 사지의 부분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특히 다행인 것은 거울 덕택에 내 눈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혼자서는 내 눈을 볼 수 없다. 나는 오로지 거울 속에서만 내 눈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은-유감스럽게도-거울이 보여주는 내 모습은 좌우가 뒤바뀐 거짓된 나의 모습이며, 직접 만질 수는 없는 허상이다. 즉 거울 속에는 내가 없다. 그래서 오래 전에 시인 이상은 이렇게 한탄했다.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또꽤닮았소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나는 오로지 거울을 통해서만 나를 온전한 전체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과, 그 거울상이란 실은 진짜가 아니라는 것. 거울 속에는 내가 있고, 거울 속에는 내가 없다는 말이 모두 옳다는 것. 나는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거울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나의 모습이 아니다. 이런 자각 하에서 통일된 유기체로서의 신체라는 조화로운 형상이 깨지기 시작한다. 이 경우 거울이 깨지고 레비나스가 말하듯 일반적인 가시성과 표준적인 비례가 얼버무려지면서 파편들이 환각적 차원에서 드러나기 시작한다. 나는 이런 카오스를 감내할 수 없기에 자꾸 이 파편들을 조립해서 온전한 전체 형상을 회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렇게 확보된 온전한 전체 형상이란 여전히 허상이다. 이 허상으로 현시된 것이 바로 타자이며, 이 타자는 자신의 분신에 불과한 것이다.  

   노진아의 근작에서 “나는 오믈렛이요(Je suis l'hommelette)”라고 말하는 화자는 알 껍질을 깨고-아니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알 껍질이 깨지면서-나온 오믈렛(homme lette 乳兒)이다. 의미 심장한 것은 이 알이 바로 눈알이라는 점이다. 눈알. 이 오믈렛의 탄생과 더불어 깨져 버렸기에 그의 하나 남은 눈은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이제 볼 수 없다. 그러나 오믈렛은 그가 볼 수 없게 된 지점에서 본다. 보이지 않음에서 탄생한 보임! 오믈렛은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바라본다. 마치 거울을 보듯. 그리고 나에게 자신의 자아가, 달리 말해 거울상이 되어달라고 요청한다. 나를 보면서, 즉 거울을 보면서 오믈렛은 변형을 꿈꾼다. 그리고 그 속에서 흩어지고 사라지기를 바란다.

 

“두 개의 방으로 구성된 <나는 오믈렛이요(Je suis l'hommelette)>에서 한 쪽 방에는 인간의 가장 예민한 감각기관인 눈을 깨고 태어난 사이보그가 인간이 되는 환상을 꿈꾸고 있다. 관객이 다가서면 사이보그는 꿈꾸기를 멈추고 관객을 응시하기 시작한다. 다른 방에는 사이보그의 시야에 잡힌 대상이 투사되는데 관객은 사이보그의 자아가 되어 그 앞에 마련된 키보드로 반대편 방의 관객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한 쪽 방에만 관객이 있을 경우 사이보그는 관객에게 자신이 아직 자아가 형성되지 않았음을 호소하거나 자신의 자아가 되어주기를 재촉한다” (이주현, 전시 서문에서)  

 

   그러므로 노진아의 근작에서 내가 만나는 것은 오믈렛이 아니다. 오믈렛은 오믈렛이 아니라 타자다. 건너편에서 “당신은 누구요?”라는 물음에 “나는 오징어다”라고 답하는 타자. 그러나 그 건너편에서 “나는 오징어”라고 말하는 타자 역시, 자신의 거울을 찾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처음부터 거울에 비친 상은 허상이다. 그러니 나도 건너편의 타자도 보지만 보지 못한다. 여기서 다시금 거울 속에는 내가 있고, 거울 속에는 내가 없다는 역설이 작동한다.

   그렇다면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를 비밀리에 보고 있는 아버지가 있다. 이 아버지란 보이는 세계의 이면에서 나의 나됨에 개입하는 보이지 않는 시선이다. 그 시선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 얼굴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저 얼굴이 진실로 내 얼굴일까 의심하게 만든다. 이 시선에 포섭됨으로써, 혹은 그 시스템에 편입됨으로써 나는 빠져나올 수 없는 순환의 고리에 갇힌다. 적극적으로 수동적인, 수동적으로 적극적인 순환의 고리 말이다.                

 

“이 작품과 상호작용하면서 사이보그가 인간적인 주체를 형성하려는 부질없는 과정에 아무런 감흥이 없는 관객이라면 그는 자신이 기계적 주체가 되어간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지각하지 못하는 이일 것이다. …그녀의 작업에서 인간 대 인간의 전인격적 소통에 대한 휴머니즘적 향수가 묻어나는 것은 동시대의 병적 현상을 가장 예민하게 지각하는 예술가로서의 고통을 숨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기계적 체제를 추종할 때의 징후적 속성을 다루던 노진아는 이번 작업에서 보다 깊이 있는 본질로 접근했다.(이주현, 전시 서문에서)

 

그러나 오믈렛은 진정 인간적인 주체가 되고 싶었을까?  

 

글.홍지석 (홍익대 예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