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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_book review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3. 3. 20:25


더 이상 숭배해야 할 것이 남아있지 않다. 우리가 지켜내고자 하는(혹은 했던) 영원불멸, 유일무이, 숭고, 신성 등의 가치를 비웃으며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자본주의와 상품들, 대규모의 군중, 그리고 이들이 낳은 현대성의 환영들로 이루어진 메트로폴리스라는 새로운 고향이다. 우리는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아간다. 우리의 흔적은 도시의 인공물에 새겨질 것이며, 인류의 과거와 현재, 미래는 이제 도시 공간에서 읽혀질 것이다. 이런 말들이 너무 오래되어 진부한, 혹은 너무 지나친 이야기처럼 들리는 사람은 더더욱 이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벤야민은 메트로폴리스를 비판적으로 독해하기 이전에 우리 자신을 메트로폴리스와 같이 취급해야 한다고 . 심지어 벤야민은 도시에 관한 텍스트들이 형식과 내용 그 자체로 도시의 모습과 같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도시 연구에서 진부하지 않은 질문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대도시를 재현하고 현대성을 포착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커뮤니케이션할 것인가?”

당신도 느끼고 있을 줄로 안다. 최근들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도시’, ‘공간’ 에 대한 관심을, 그리고 오염된 대기처럼 모호하게 우리 주변에 부유하는 현대성과 일상성이라는 문제 제기 혹은 질문들을. 21세기의 지식인, 문화인, 혹은 예술인이라면 이제 도시와 현대성을 읽어내야 한다는 명령이 도처에서 들려오지만,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우리는 이미 너무 익숙해졌거나 쉽게 도취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다만, 도시 공간을 읽어내는 작업이 ‘현대성’ 이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동시에 구체적인 인간의 삶과 활동이라는 미시적인 관점에서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는 짐작은 할 수 있다. 도시 환경에 의한 시공간의 조직과 인간 활동 사이의 복합적 상호 관련성에 관심을 가졌던 발터 벤야민의 저작들을 읽어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나폴리, 모스크바, 파리, 베를린 등 벤야민의 다양한 도시 연구와 저작들을 일일이 찾아볼 여력도 시간도 없다면, 일단 이 책을 통해 그램 질로크의 안내를 받아보기로 하자. 글쓴이 그램 질로크 스스로 밝힌 것처럼, 이 책은 벤야민의 도시 연구들에 나타난 주제상의 연속성과 충돌을 ‘총체적으로’ 탐구하려는 시도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책은 현대 사회의 성격을 일차원적으로 부정하지도 않고, 현대의 사회적 형식에 맹목적으로 순응하지도 않으면서 대도시의 삶에 대한 비판적 이론을 제시한다. 즉, 도시에 대한 양가적 시각을 통해 현대 문화를 민감하고 복합적으로 독해하게끔 돕고 있는 것이다. 내용을 대충이나마 살펴보자. 서론에서 글쓴이는 벤야민 도시 저작의 핵심적인 주제들과 되풀이되는 모티프-관상학, 현상학, 신화, 역사, 정치학, 텍스트 등-들의 윤곽을 그리면서 벤야민의 도시 연구를 이해하는 일련의 방향을 제시해준다. 이어지는 2장에서는 벤야민이 거리 산보를 통해 여러 시대의 시간층이 미로처럼 얽혀 있는 대도시 공간에서 유년기 기억과 함께 집단적 무의식을 찾아내는 과정이 아련하다. 3장은 19세기 파리에 대한 연구인 ‘파사주 프로젝트’ 에 대한 분석, 4장은 알레고리와 보들레르 연구를 통한 도시 거주민, 대중 연구가 초점이다.

그러나 글쓴이 그램 질로크가 이와 같은 벤야민의 관심사들을 시각적인 것의 지배, 모사되고 복제되는 이미지, 직접적인 충격에 대한 열망 등 현대 사회의 예술 형식의 주요한 특징들과 계속해서 연결시키고 있음을 감지한다면, 이 책이 결코 벤야민 전문가나 인문학도를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글쓴이는 “알레고리의 본래 관심은 언어학이라기보다 시각이다, 나의 거대한 원초적인 열망은 이미지였다” 는 벤야민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이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알레고리적 시학, 반복동일성, 무의지적 기억 등 벤야민을 이해하기 위해 요구되는 난해한 용어와 개념들이 머리가 아픈 사람들에게, 현대 도시 성찰의 주요 지점들이 차근차근 소개되어 있는 서론은 꽤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책을 덮고 나서, 혹은 책을 읽는 와중에 도시를 성찰하는 하나의 ‘시선’ 을 발견하는 일이다. 대도시의 현대적 경험들을 일컬어 ‘신화의 새로운 징후와 현대성의 환영이 나타나는 주요 장소’, ‘폐허’, ‘충격’, ‘지속적인 고통과 갈등의 장소’ 등으로 표현했던 벤야민에게도, 도시는 결국 ‘온통 삶으로 이루어진 풍경’ 이었음을 기억하자. 상품화와 반복에 뿌리를 둔 특수한 현대의 세속적 감수성들은 화려한 청담동 거리에서, 말끔히 복개된 청계천에서, 불타 없어진 숭례문의 잔해 속에서 발굴되고 읽혀질 것이다. 벤야민에게 역사는 이러한 파국과 복구의 기획이었고, 도시의 ‘관찰자’ 들이란 바로 그러한 이미지들을 발굴하는 시선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면 다시 초반부에 던졌던 질문으로 되돌아가보자. “이렇게 ‘보여지는’ 도시의 이미지들을 어떻게 소통시킬 것인가?”

“이제 나는 당신에게 조그만 고백 하나를 해야겠소. (중략) 아주 묘하게도 옛날 생활의 그림과는 다른 어떤 새로운 방법을 찾아, 현대생활의 아니 차라리 더욱 추상적인 현대의 어떤 생활의 묘사에 적응시켜 보자는 시도가 나에게 떠오른 것입니다. 우리들 중 누가 한창 야심만만한 시절, 이같은 꿈을 꾸어보지 않은 자가 있겠습니까? (중략) 이같이 집요한 이상이 태어난 것은 특히 대도시들을 자주 드나들며 이들 도시의 무수한 관계에 부딪히면서부터입니다. 나의 친애하는 친구, 당신 자신도 째지는 듯한 ‘유리장수’ 의 소리를 샹송으로 번역해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 않았었나요? 이 소리가 거리의 가장 높은 안개를 가로질러 다락방에까지 보내는 모든 서글픈 암시들을 서정적 산문으로 표현해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 않았던가요?”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의 머리말 : 아르젠느 우세에게

과거의 방법으로는 더 이상 현대의 것을 이야기할 수 없으리라는 고백, 새로운 대도시의 경험을 번역하고자 하는 기획. 1862년의 시인 보들레르조차 대도시를 재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대도시 그 자체를 닮아야 함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대도시를 닮은, 대도시와도 같은 새로운 예술 형식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한 표현에서부터 소통을 꾀하는 것, 감히 지금의 미디어 연구자 및 아티스트들이 시도해볼만한 현대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아닐지.

글.유단비.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영상커뮤니케이션 전공(idnaruhod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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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램 질로크 지음 | 효형출판 펴냄
20세기의 가장 독창적이고 통찰력 있는 사상가로 널리 인정받는 발터 벤야민. 이 책은 발터 벤야민과 함께 현대 도시를 산책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이다. 벤야민이 전 생애에 걸쳐 겪은 도시의 매혹과 대도시 경험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며 자연스럽게 그의 도시 관찰 방법을 익힐 수 있다. 현대 도시 환경에 대한 벤야민의 비판적이고 복합적인 설명은 여러 핵심 텍스트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저작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