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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Blue Territory_금혜원전_덕원갤러리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5. 8.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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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afternoon, 디지털 프린트, 70×262cm, 2007

일시: 2008년 5월 7일 ~20일
장소: 덕원갤러리 3층

글. 김상우
파란 너울, 사진으로 추상하기
모든 예술이 인간의 현존에 의지함에 비해 오직 사진에서만이 그것의 부재를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_앙드레 바쟁 일찍이 앙드레 바쟁은 사진에서 인류의 오랜 꿈이 완성됐다고 생각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고 싶어 했던 몽상이 실현됐다는 얘기다. 그랬던 바쟁이 소련의 몽타주영화를 극도로 비판했던 것은 이유가 있었다. 인공적인 손질을 거치며 현실성이 부서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바쟁만 그렇게 믿었던 것은 아니다. 바르트 역시 사진을 ‘약호 없는 전언’으로 간주하며, (나중에 복잡하게 철회되지만) 약호에 끼어든 인간의 흔적이 제거된다고 보았다. 사진-기계의 중립성은 그렇게 작가의 ‘손길’을 없애버렸고, 나중에 가서 작가마저 살해한 것은 (그렇게 보였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겠다. 진실성의 신화는 그렇게 탄생했고, 뒤이어 현실의 지문, 시네마 베리테, 스트레이트 포토 등등, 당시에 매력적이며 현실적인 ‘운동’으로 이어졌다. 사진-형식의 진실성과 사진-내용의 현장성의 짝패는 안성맞춤일 수밖에 없었겠다.
그러나, 그것은 순진한 꿈이다. 오늘날 사진의 진실성 운운해 봤자, 믿을 사람은 많지 않다. 기록의 신화는 조작의 ‘오명’으로 오래전에 얼룩졌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까지 여러 현장을 누비며 기록하는 행위를 폄훼해선 안 되겠다. 다만, 믿음의 토대가 흔들린 것만은, 돌이킬 수 없게 됐다는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사진-기계’는 마치 생산수단처럼 죽은 노동이 ‘물화된 장치’일 지도 모른다. 노동을 대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다른 형식의 노동일뿐이다. 질적인 ‘감가상각’이라고 하면 정확할지 모르겠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자 사진을 둘러싼 문화적 지형 또한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진이 그림을 물리치고 왕좌에 오르고, 사진과 그림의 경계가 조금씩 없어지자, 이제는 조작의 여부는 문제도 아니게 됐기 때문이다. 마치 그림 그리듯 사진을 찍고 자르고 붙이고 하는 것이다. 금혜원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그녀의 작업에서 사진은 사진으로 기능하지 못한다. 사진의 효과를 이용하고, 사진의 가면을 썼을 뿐으로, 오히려 속임수에 가깝다. 사진을 속이고, 관객을 속이고, 어쩌면 자신까지 속이는 알리바이일지 모른다.
이 결과, 여러 시점이 등장하여, 평면은 평면이되 시점의 굴곡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심하게 말해서, 눈이 여러 개 달린 괴물 같은 모습이다. 여기에 과잉된 파랑색이 난무하여, 평면의 효과를 더욱 강화한다. 마치 파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재개발 풍경을 찍은 것은 아닐까 생각할 정도다. 그녀가 파랑에 집착하는 까닭을 사진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그녀의 어릴 적 기억 때문일 수도 있고, 우연히 발견한 파랑에 눈길이 잡혔을 수도 있다. 정신분석학에 의거해 그녀의 진술을 스무고개 놀이하듯 분석하는 것이 필요할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부와 외부가 만나는 접점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사진-형식과 사진-내용의 이중적 진실성을 희생시키고 무엇을 얻었는가. 재개발 풍경을 뒤로하고 무엇이 나타났는가. 대가는 ‘자기 자신’이다.
작가의 현존’은 금혜원의 세 번째 특징을 이룬다. 풍경의 모습은 그대로되, 복판에 있거나 좌우에 자신을 노출한다. 거기서 그녀는 어딘가 먼 것을 응시한다. 시선은 재개발 풍경의 ‘너머’에 있다. 마치 폐허 위에 딛고 서는 ‘그림’이 중요한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태도는 우장막의 파랑색을 전면에 내세운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 그녀는 세상에 관심이 없다. 재개발 풍경을 사회과학적 칼날로 해부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여기다. 그녀는 무엇 때문에 사진-형식과 사진-내용의 이중적 우회로를 거쳐서, 결국은 자신에게 모호하게 되돌아 왔을까. 눈여겨볼 점은 ‘이중의 분열’이다. 우선 전체작품의 분열이다. 앞서 지적했듯, 그녀의 작업은 재개발 풍경이되 자신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분열된다. 시점으로 설명한다면, (자신을 바라보는) 3인칭 시점과 (자신이 바라보는) 1인칭 시점이 공존하는 셈이다. 이것은 고스란히 두 번째 분열로 이어진다. 작가자신의 분열로서, 내면과 풍경이 뒤섞인다. 왜냐하면 그녀의 작업에서 풍경 또한 내면의 외화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장막의 사회적 함축을 제거하고, 색면추상의 효과를 추구한 점에서 입증된다. 결국, 자신이 가둬둔 (내면의) 풍경에 자신을 던져놓고, 자신을 응시하는 것이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내부와 외부가 교묘히 얽히는 셈인데, 이 가운데 외부는 자연스레 실종되고, 내부의 폐쇄회로만 형성된다. 인간의 부재는커녕, 그녀의 작업은 그녀의 현존만 가득하다.
일찍이 추상과 감정(이입)은 미술의 중요한 두 가지 충동으로 지적됐다. “감정이입 충동은 인간과 외부세계의 현상 간에 신뢰할 수 있는 행복한 범신론적 관계를 전제로 하지만 추상 충동은 외부세계의 현상에 의해 야기된 인간의 과도한 심리적 불안감의 산물이다. 아마 이런 상태를 공간에 대한 무한한 심리적 공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보링거) 보링거의 생각대로면, 금혜원의 작업은 역설이다. 현실에 대한 동화(사진)인 동시에 거부(추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행복과 불안의 (심리적인) 엇박자일까, 추상과 감정의 (예술사적) 화해일까. 무엇이든 작가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어 보이다. 스스로 결정한 것인지 세상에 결정된 것인지, 불확실한 탓이다. 그러니, 보고 싶은 눈과 거부하는 몸을 안고, 그대로 살아갈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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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territory, 디지털 프린트, 70×210cm,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