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미디어아트 전시

선전공화국_The Republic of Propaganda : 김기라展_exhibition review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8. 21. 00:08



내게는 ‘김기라’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즉각적으로, 그리고 비자발적으로 떠오르는 어떤 강력한 기억, 또는 충격의 느낌이 있다. 이러한 기억, 충격은 그의 2002년 작 <29층>과 연루된 것이다. <29층>은 김기라가 비디오 캠코더를 들고 29층 아파트 옥상까지 올라가 그것을 난간 아래로 그러니까 저 아래 땅바닥으로 내던지는 방식으로 제작한 것이다. 곧 나-캠코더는 협소한 아파트 계단을 올라가고 다시 중력의 법칙에 따라 땅바닥으로 떨어진다. 클라이맥스는 그것이 떨어져 땅과 충돌하는 순간이다. 여기서 나는 내 머리가 땅에 부딪혀 깨지는 것 같은 아픈, 너무 아픈(!) 충격을 받는다. 그것은 모든 나의 충돌의 경험들, 이를테면 높은 철봉에서 떨어져 턱이 깨졌던 일,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눈살이 찢어졌던 일들과 한데 엮여 나를 아프게 찔러 온다.



21st Century world, 3D animation and sound 5.1_2008

이런 기억, 또는 느낌이 주는 불쾌감 때문인지, 아니면 그것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싶다는 자학적 취미 때문인지, 김기라의 근작들을 더듬는 나의 시선, 아니 내 몸은 충돌, 깨짐, 고통과 파괴를 찾아 맴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작품들 역시 깨져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여기에는 깨진 조각들이 있고 그 조각들의 충돌이 있다. 그러한 충돌은 나를 고통스럽게……까지는 아니라도 불쾌하게 만든다. 특히 지하 1층의 전시가 그렇다. 여기서 방송사 뉴스를 절단하여 얻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라는 소리와 이미지들이 다른 깨진 것들, 예를 들어 20th Century Fox와 Coca-Cola를 절단, 재결합하여 얻은 뜬금없는 21st Century World와 Coca-Killer의 이미지들과 어울려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협화음을 빚어낸다. 그래서 Universal Pictures를 깨트려 만든 Universal World는 어떤 조소처럼 느껴진다.



Coca killer, LED system sculpture_65x600x20cm_2008

그런데 나는 여기서 불쾌하지만 고통스럽지는 않다. 그것은 시끄럽기는 하나 아프지는 않다. <29층>에서 나를 자극했던 강력한 감각적 충격이 여기에는 없다. 하여 나의 인식이, 나의 사유가 작동할 틈이 생긴다. 그 틈으로부터 나의 사유는 어떤 ‘수집가’의 이미지를 빚어낸다. 어떤 의미에서 김기라는 수집가다. 그의 재료들, 그의 조각들, 파편들은 그냥 아무렇게나 얻은 것이 아니다. 그것들을 한데 포섭하는 마법의 원이 존재한다. 수집가-김기라는 사물들과 이미지들을 그 본래의 기능으로부터 떼어내 그것을 자신이 제작한 마법의 원에 포섭한다. 예컨대 2층에 있는 <A Security Garden as Paranoia>를 보자. 여기에는 분청사기(의 모조품), 고려청자(의 모조품), 그리고 선인장, 분재식물들, 오리엔탈풍의 기념품들이 한데 모여 진열장에서 전시중이다. 물론 이 사물들, 이미지들은 그 본래의 기능과 맥락에서 분리되어 다른 문맥에 놓여 있다. 예컨대 여기서 분청사기는 박물관 분청사기실에서처럼 한국성의 현시로, 또는 우리 조상들의 우수한 기술력과 탁월한 미의식을 잘 보여주는 본보기로 기능하지 않는다. 고려청자나 분재식물들, 그리고 다른 것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A security garden as paranoia, LED bulbs, Designed speakers, Sound,Ceramics, CCTV, Plants installation_2008

하지만 이렇게 모여 있는 것들로부터 어떤 연속성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불연속적이다. 불연속이기에 한 지점으로부터 다른 지점으로의 일관된, 그리고 부드러운 운동이 불가능하다. 차라리 여기서 운동은 중단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즉 여기서 운동하는 것, 흘러가는 허망한 것들은 석화(石化)되고 응결된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중단된, 그러나 영원한 삶을 얻는다. 마법에 걸려 얼음 결정체에 갇힌 사람들, 영원한 잠에 빠진 사람들처럼 말이다. 분명히 그것들은 삶(life)을 지니지만 그것은 정지된 삶(still-life)이다. 마치 흘러가는 시간을 응결시켜 보존하기 위해 찍은 한 장의 사진(still-photography)처럼 이 수집품 하나하나는 수집가의 기억, 의식, 사고들이 응결된 어떤 것들이다. 이 응결되고 석화된 것들이 수집가의 기억 궁전을 구성하는 받침돌, 뼈대, 대좌, 그리고 봉인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2007년 김기라의 개인전 제목이 <A Palace of Mirage>, 곧 ‘신기루 궁전’이었음은 의미심장하다.



Still life with a shrimp burger,Oil on 50P Canvas 2008

흘러가는 덧없는 것이 응결되는 순간, 운동이 중단되는 순간은 파국의 순간이다. 밑으로 향하는 운동이 중단되는 순간은 캠코더가 깨지는 순간이요, 내 머리가 깨지는 순간인 것이다. 지금 수집가-김기라는 이런 파국의 순간에 몰두한다. 1층 전시장에 가득한 정물화들(Still-lifes), 2층 복도로 향하는 벽면에 그려 넣은 알레고리들이 그렇다. 이 작업들은 연속적인 것에서 불연속을 추구하는 파괴적 성격과 연루된다.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파괴적 성격은 지속적인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어디에서나 길을 보게 된다. 또 어디에서나 길을 보기 때문에 그 자신은 언제나 교차로에 서있다. 현존하는 것을 그는 파편으로 만드는데 그것은 파편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파편을 통해 이어지는 길을 위해서다. 언젠가 김기라가 쓴 동화(같은 글)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그 소년은 또 길을 잃고 헤메고 있습니다....... "헉헉....... 여기가 어디지?......." 여기저기 상처를 입고도 그는 달리고 또 넘어지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끝없이 도망간다고 하는데.......그는 분명 이 도시 어딘가에서 사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 녀석의 이름....... 분명......."뭐였더라.......?" 하여간 진짜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개구쟁이라고 불렀습니다. 내게 그 개구쟁이는 지도에서 한참 동안을 찾아도 못 찾을 지명이 지구라고 했던가.......? 여하튼 푸른 섬에 살고 있다는 말을 했지만 난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아무튼 매일 어디론지 모르지만 도망치곤 했다가 다시 나타나는 그 소년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일체 어른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한결 같이 자신의 취미와 관심에만 몰두하는 그런 친구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글. 홍지석(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