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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미디어키즈의 로맨스 혹은 블루스[각주:1]


“나의 세 개의 머리는 완벽하게 작동하면서 이 세계를 철저하게 구축했다…나는 줄곧 이 안주의 장소에서 탈출하려고 하지 않고 매일매일 관대와 성실과 정직과 놀았고 여자와 연애했고, 시시한 살인사건을 해결하고 즐겁게 살 수 있도록 구축되어 있다. 만일 내가 영원히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성장하지 않는다면 말이지.”(<츠쿠모 주쿠>)


. 첫째 거대서사가 소멸한 탈근대 시대에서 서사는 어떻게 바뀌며 어떻게 존재하는가. 둘째 그렇게 변화된 서사를 어떠한 개념을 통해서 독해할 것인가. 이 두 가지 문제를 분석하면서, 아즈마 히로키는 이른바 ‘오타쿠의 실존적 문제’까지 건드려 보자고 제안한다. ‘오타쿠의 실존적 문제’라고 하면,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이른바 ‘오덕후’(오타쿠의 한국어 음역)로 불리는 계층인 오타쿠, 미소녀게임을 즐기며 희희낙락거리는 ‘뇌 내 망상증 환자’는 실존이 아니라 ‘존재’가 문제인 존재가 아닌가. 하지만 아즈마 히로키의 생각은 다르다. 오타쿠는 탈근대 주체의 바로미터이며, 라이트노벨과 미소녀게임은 탈근대 서사의 리트머스용지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탈근대 사회와 시대에서 드러나는 징후를 읽는 열쇠라는 것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1.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은 ‘라이트노벨’과 ‘미소녀게임’을 주제로 삼아,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2. 우선, 사전 설명이 필요하겠다. 오타쿠야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라이트노벨’과 ‘미소녀게임’은 사정이 다르다. 사실, 한국에서 두 가지는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형식’이며, 이른바 ‘동인녀’나 ‘덕후형’ 아니면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따라서, 아즈마 히로키의 설명에서 실마리를 얻는 게 좋겠다. 그런데 히로키가 보기에도 라이트노벨은 현지 일본에서도 정체가 불분명하다. 서점의 가판대에 가면, 라이트노벨로 분류되는 소설들은 많지만, 정작 소설을 읽어보면 각종 장르가 혼재돼 있을 뿐더러 복수의 장르가 내재된 작품까지 존재하는 실정이다. 그래서 히로키는 단언한다. 라이트노벨은 ‘장르문학’이 아니라는 것. 과학소설이든 범죄소설이든, 장르문학은 일정한 ‘규칙’이 존재하지만, ‘라이트노벨’은 그 같은 규칙을 따르지 않으며, 장르문학의 경우처럼 그런 게 문제거리도 안 된다. 그러면 라이트노벨은 어떻게 규정해야 좋을까. “드라마의 결론으로 인물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의 성질이 드라마에 우선한다.”(신조 가즈마) 이건 또 무슨 말일까.

3. 이전에도 수용자가 자기의 욕망대로 캐릭터를 ‘떼어 내고 뜯어 고쳐’ 텍스트를 생산하는 문화는 존재했다. 팬픽이 대표적인 사례다. 만화든 영화든 실제사람이든 관계없이 자기가 좋아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대부분 연애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런데 라이트노벨의 경우는 그와는 또 다르다. 그것이 일정한 소설군에서 명확한 ‘규칙’으로 적극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단순한 수용문화를 넘어선 것으로, 명확한 생산양식으로 진화했다는 얘기다. 그렇게 되자 당연히 생산 역시 서사의 구성보다 캐릭터의 조형을 중심으로 판도가 돌아간다. 근대의 서사양식과는 명확하게 판이한 과정이다. 여기서 히로키는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사용했던 개념인 ‘캐릭터의 데이터베이스’(캐릭터의 자율화)를 다시 등장시킨다. 서사의 올가미를 벗어나 자유롭게 존재하는 캐릭터들의 집합을 뜻하는 개념이다. 과거의 민담에서 서사의 유형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현재의 라이트노벨에서 캐릭터들의 집합이 존재하며, 똑같이 작품의 ‘원형’으로 기능한다. 뭐랄까, 어떤 요리를 할지 고민하는 게 아니라, 재료에 따라 요리를 한다고 할까. 이러한 사항을 바탕으로 히로키는 라이트노벨을 “캐릭터의 데이터베이스를 환경으로 하여 쓰인 소설”로 규정한다. 자유를 획득한 캐릭터들이 자신만이 거주하는 ‘세계’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예술작품의 세계를 미적인 가상이라고 한다면, 캐릭터의 데이터베이스는 가상Schein의 가상일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캐릭터를 일렬로 줄 세우는 서사가 없는 곳이며, 작가와 독자가 서로 호흡하는 일종의 ‘인터페이스’로서 작동한다. 일종의 상상된 미디어문화 공동체라는 것이다.

4. 여기서 아즈마 히로키의 전제를 다시금 확인하는 게 좋겠다. 그는 근대와 탈근대로 시대를 구분하고, 자연주의적 리얼리즘과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이 각기 시대에 대응하는 문학형식이라고 설명한다. “라이트노벨은 본질적으로 포스트모던 소설형식이다.”[각주:2] 여기서 근대적 미학의 개념이 라이트노벨을 설명할 때 속수무책이었던 까닭이 설명된다. 체계를 쌓고 가지를 치는 근대의 개념틀로는 온갖 것이 뒤섞인 포스트모던 잡종을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그래서 히로키는 ‘형식’이란 말도 ‘장르’라는 개념도 쓰지 않고 ‘소설군’으로 표현한다) 그러면 만화애니메이션 리얼리즘이란 무엇일까. 이 개념은 자연주의적 리얼리즘과 비교하면 명확해진다. 주지하다시피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은 근대문학의 방법으로서, 자아가 현실에서 부딪혀 가면서 의미를 찾는 과정을 묘사한다. 그러나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캐릭터’가 자아를 대신하며, ‘만화애니메이션이 구성한 세계’(매체가 매개한 현실)가 현실을 대체한다. “<루팡 3세>의 활자판을 쓰고 싶었다.”(아라이 모토코) 한마디로, 쓰고 싶은 동기도 묘사하는 세계도, 현실(자연)이 아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이야기는 현실에 직면하지 않으며 또 직면할 필요도 없다. 캐릭터소설은 데이터베이스를 참조하여 만들어지고, 그렇게 생산된 캐릭터소설은 다시 한 번 데이터베이스를 풍성하게 채운다.”(이러한 세계는 히로키의 말대로 재귀적인 세계로서, ‘미디어키즈’는 매체의 폐쇄회로에서 영구순환할 수밖에 없다. 물론, 새로운 문학론(게임적 리얼리즘)을 구상하는 히로키로서는 데이터베이스를 ‘풍성’하게 한다고 말하지만,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을까. 새로운 질료를 수급할 통로가 원천적으로 막혀 있기 때문이다.)

5.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을 설명할 때 아즈마 히로키는 오쓰카 에이지의 논의를 상당부분 빌려온다. 새로운 문학론을 구상하는 측면에서 보면, 에이지의 전략을 그대로 따른다고 봐도 무방하다. 에이지는 전근대 민담이 불투명성(환상)에, 근대의 소설이 투명성(현실)에, 탈근대 만화가 반투명성(환상과 현실의 중첩)에 기초한다고 설명한다. 이 반투명성이야말로 만화 같은 이야기의 만화 같지 않은 효과를 보장하는 장치다. 오쓰카 에이지는 현대만화를 개척한 데쯔카 오사무의 <승리의 날까지>를 비평하면서, 현실과 무관한 기호일 뿐인 만화가 어떻게 현실과 조우하게 됐는지 설명한다. “이 장면에는 확실히 만화적인 캐릭터가 기호적인 표현인데도 불구하고 총탄세례를 받고 피를 흘리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히로키나 에이지는 ‘만화 같은 소설’의 문학성을 인정할 수 있다. 주체와 현실의 끝나지 않을 줄다리기를 표현한다는 것. 어찌 보면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만화에는 현실과 비현실(환상)을 중첩하는 구조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의 뒷면 같은 게 엿보인다고 생각한다.[각주:3] “그러나 필자로서는 캐릭터소설의 매력을 오히려 비현실적 캐릭터에 의한 현실의 난반사로 보고 싶다. 일상을 묘사하기 위해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어떻게 필연적인 것으로 할 수 있는가, 바로 거기에 전근대의 이야기와도 근대 자연주의와도 다른 캐릭터소설의 문학적 도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의 경우 오히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고 하지만, 가라타니 고진이 밝혔던 것처럼 풍경(현실)도 자아(내면)도 구성된결과라는 사실을 은폐하지 않는가.
 
6. 하지만,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존재한다. ‘게임 같은 소설’을 두 사람이 다르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오쓰카 에이지는 ‘만화 같은 소설’은 인정했어도 ‘게임 같은 소설’을 용인하지 않았다. 바로 죽음 때문이다. 유한한 존재의 본질적 한계인 ‘죽음’을 게임은 온전히 다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리셋 가능한 죽음이 과연 죽음일까. 여기서 오쓰카 에이지는 ‘게임 같은 문학’을 비판하지만 히로키는 바로 여기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 히로키가 보기에 에이지는 ‘캐릭터의 자율성’은 인정했지만, 이 결과 발생하는 ‘메타이야기 환경’은 부정했다. 아무리 ‘나’를 대신한 ‘캐릭터’일 지라도, 죽음이란 한계만큼은 벗어날 수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히로키의 지적대로, 캐릭터가 서사의 굴레에서 벗어난다고 할 지라도, 거주지가 없는 난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앞서 지적한 대로, 자신과 동등한 여러 캐릭터들이 노니는 자기만의 세계(메타이야기)를 요청하는 게 당연하며, 그렇게 구성된 세계가 작가와 독자의 일종의 ‘인터페이스’ 역할을 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물론, 후자의 세계에서 죽음의 의미 또한 달라질 테고. 히로키는 그래서 주장한다. 게임 같은 소설은 죽음의 문제를 방기한 게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며, 미디어키즈의 실존을 새롭게 드러낸다고. 그게 바로 ‘게임적 리얼리즘’이다.

7. 히로키가 게임적 리얼리즘을 통해서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게임의 경험과 형식(인터페이스)가 소설의 내용과 형식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가, 그리고 미디어키드의 실존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그는 라이트노벨과 미소녀게임을 비평하며, 게임적 리얼리즘이 어떻게 구현되는지 실증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커다란 벽이 있다. 히로키의 비평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아무리 한국이 일본의 대중문화권에 속한다고 할 지라도, 대부분 가볍게 즐기는 사람이 다수이며, 소수의 사람만이 섬세한 안테나로 그 현상을 감지할 따름이다. 그나마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손쉽게 수용할 수 있지만, 라이트노벨과 특히 미소녀게임은 최종 진화형 매니아가 아니라면 알기 어려운 작업들이 태반이다.

8. 그럼에도 몇 가지 질문은 가능할 것이다. 우선, 왜 ‘문학론’이었을까. 이 질문은 우문처럼 보인다. 애초의 의도가 라이트노벨을 질료로 삼아, 새로운 문학론을 전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히로키가 지적한 대로, 오늘날 ‘미디어믹스’된 매체환경을 생각해 보면 조금 뜻밖처럼 보인다. 과연 문학이 그 만큼 섬세한 탐지기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오늘날의 매체환경에서 문학‘형식’은 힘이 별로 없다. 단순히 늙었기 때문이 아니라, 잠재력이 완전히 방전된 탓이 크다. 물론, 새로운 매체의 잠재력을 과거의 매체를 통해서 확인하는 분석도 중요하긴 하다. 하지만 그것은 임시적인 시도일 따름이다. “모든 예술형식들의 역사는 위기의 시기를 겪는데, 바로 이때 예술형식들은 변화된 기술규준에 따라야, 즉 새로운 예술형식에서 속박 없이 발생하는 효과를 얻고자 몰려간다…최근의 다다이즘은 그런 야만주의를 물씬 풍기고 있다. 다다이즘의 충동은 이제야 인식할 수 있게 됐다. 다다이즘은 대중이 오늘날 영화에서 찾고 있는 효과를 회화나 문학의 수단으로 산출하고자 했다.”(벤야민) 그리고 효과의 완성은 당연히 새로운 매체의 몫이었다. 아무리 미래파가 영화적 경험과 형식을 회화로 표현하며, 새로운 매체경험의 완충지대 역할을 했을지는 몰라도, 영화에 비할 게 못 됐고, 현대인의 변화된 지각과 감성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후, 회화가 어떻게 자폐아의 길을 걸었는지는 두말하면 잔소리겠다. 무엇 때문에 여전히 문학의 미래를 찾아야 하는가. 신화가 유물이 되었던 것처럼, 근대소설도 유물이 되면 안 되는 것일까. 그래서 문학의 노욕 같다. 아즈마 히로키의 논의는 시대착오처럼 보이기도 하다.

9. ‘리얼리즘’을 ‘고집’하는 문제도 그렇다. 물론, 에이지의 논의에서 기본적인 골격을 따왔기 때문에, 그 같은 문제설정에 사로잡혔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히로키 역시 긍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에이지와 마찬가지로 ‘죽음’(유한한 인간의 극복불가능한 한계의 문제)을 중요한 기준으로 생각한다. 실존과의 싸움은 여전히 유의한 문학성이란 것. 그래서 그는 실존의 문제가 없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있다’고 반박하고 수정한다. 문제적 인간의 의미찾기는 방식만 다를 뿐 여전한 것이다. 솔직히 모를 일이다. 그가 전제로 삼은 탈근대 사회가 해체한 것이 과연 이야기뿐이었을까. 가치와 이념과 실존이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까. 생각하지도 않고, 아예, 그냥, 놀아도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세상이라면.

10. 아즈마 히로키는 게임의 경험과 형식을 문제로 삼지만, 다른 측면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게임의 소명구조다. 오늘날 주체는 피로한 신세다. 근대에 일치감치 소명을 주던 존재를 없애버렸기에, 스스로 소명을 찾아야 했지만, 그리고 찾았다고 믿었지만, 결국은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다. 하지만 게임은 다르다. 어떤 게임이든 게임에 ‘임하면’, 곧바로 소명이 사용자에게 제시된다.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해라, 할 것이 명확하다. 현실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떤 선택을 할지 고민할 때와 완전히 다르다. 그 안에서 그는 오롯한 주체로 성립한다. “실제로 언제 어디서든 대기하고 있다가 어떤 질문에도 두드리면 반응하듯이 대답해 주는 미디어는, 잃어버린 반쪽인 어머니의 이상적인 대리물이며, 그와 한쌍을 이룬 아이들은 전자자궁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폐쇄된 영역 속에 틀어박힐 수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매체는 심술궂게 계속 변신하지는 않는 친절한 거울이며, 테크노나르시시즘의 경계에 있는 허약한 나르시스들은 매체를 상대로 행복한 거울단계 속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행복한, 결국은 밖으로 나가기 위한 갈등의 계기를 빼앗겼다는 것이다.”(아사다 아키라) 전자모체 증후군을 앓는 미디어키즈는 그 같은 소명을 바랐던 게 아닐까, 그리고 그에 걸맞는 미디어외부를, 자기복제하고 자기증식하는 재귀적인 이야기의 세계를. 


글. 김상우(앨리스온 편집위원, 미학)


목차


  1. 아즈마 히로키의 논의는 매우 방대하다. 라이트노벨과 미소녀게임을 분석하며, 탈근대 문학론을 구상한다. 다양한 이론과 개념을 동원해 소설과 만화와 게임을 넘나들며 논의를 넓혀다 모았다 하면서, 따라서 이 글은 ‘게임’과 관련된 내용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게다가 분석대상은 한국에서 존재조차 감지하기 힘든 실정이다. 마치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라고 [본문으로]
  2. 아즈마 히로키는 ‘포스트모던 문학’과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을 구별하며, 후자를 전자의 하위 종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토마스 핀천의 실험적인 소설과 라이트노벨은 탈근대 시대를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는 종으로 설명된다. 포스트모더니즘소설과 라이트노벨은 내부와 외부에서 극명하게 갈라진다. 전자는 형식내부에서 실험적인 양상을 보이지만 후자는 매우 진부한 내용을 반복한다. 둘 다 서사가 약하거나 소멸되는 것은 비슷하지만 양상은 판이한 것이다. 그러나 외부의 상황은 또 다르다. 전자는 기존의 문학계 제도를 고스란히 고수하지만, 후자는 문학계 밖에서 새로운 담론과 판로를 개척한다. [본문으로]
  3. 이러한 측면은 마르쿠제의 주장이 실마리가 될 수도 있겠다. “현실이 이성의 법칙에 따라 꿈의 언어에 사로잡히지 않고서 돌파해 가는 반면에, 환상은 쾌락원칙의 언어, 즉 억압 및 억제로부터의 자유로 간주되는 속박 없는 욕망들과 충만들Erfüllungen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한다…즉 환상에는 악의에 가득 찬 인간적인 현실에 대한 극복이 담겨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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