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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과 주의: 심리생리학적 인간의 탄생 읽기
Jonathan Crary, Suspension of Perception: Attention, Spectacle, and Modern Culture, MIT Press, 2001


초등학교 입학식 광경을 보노라면, 일대 장관이 벌어진다. 일찍이 줄이라곤 서 본적이 없던 개구쟁이들은 그들대로 어리둥절한 몸짓을 남발하고, 이런 인간들을 제대로 줄을 세워야 하는 선생님들은 또 그들대로 난감한 실랑이를 치르기 일쑤다. 이때 선생님들이 하는 말씀이 바로 ‘주목’. 한시도 쉬지 않던 눈동자는 이때부터 선생님의 눈짓, 몸짓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이때부터 그들은 조금씩 ‘인간’으로 단련받기 시작한다. 하지만 인간이 되는 길이란, 멀고도 험하기 마련, 그들은 마르고 닳도록 선생님의 주의를 받지 않기 위해서 항상 ‘주의’해야 한다. 선생님의 말씀을 졸업할 때가 되면, 군대에 가서 상관의 질책을 (유형의 폭력과 함께) 신물 나도록 받아야 하고, 군대를 제대하면 상사의 감시가 (무형의 압력과 함께) 그를 기다린다. 평생 동안 주의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주의를 위한 투쟁은 인간이 되기 위한 투쟁인 것이다. ‘주의’야말로 근대시대에 인간을 ‘인간’으로 구성하는 핵심기제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라. 무엇인가 주의해 보라든지 주의해 들으라든지, 너무나 일상에 깊게 자리 잡혀 있는 말짓이자 몸짓이었던지, 우리는 딱 거기서 멈춰버리고 (물론 완전하진 않겠지만) 순식간에 ‘착한 아이’가 된다. 어쩌면 나이도 상관없고, 공간도 상관없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바로 이 자연스러운 과정에 촘촘한 ‘권력’의 손길이 닿아 있는 게 아닐까. 


조나단 크래리는 일찍이 <관찰자의 기술Techniques of Observer>(문화과학, 2001)로 잘 알려진 학자다. 여기서 그는 시각의 ‘관념’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화됐고,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마치 고고학자가 여러 문명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지층을 분석하듯, 여러 문헌과 자료를 넘나들며 집요하게 탐구했다. 탐색의 길은 크게 두 가지였다. 근대에 시각체제의 구조는 어떻게 변동했는가, 그에 따라 인간은 새로이 어떻게 형성됐는가. 크래리는 전자의 영역에서 ‘심리생리학적 시각체제’가 형성됐으며 후자의 영역에서 계량화된 ‘관찰자’가 태어났다고 논증하고, 소수의 순수예술(모더니즘)과 다수의 대중문화(사진)의 공통의 역사적 뿌리를 찾아낸다. 이때 엔진역할을 하는 것이 ‘기술’이다. 19세기 등장한 수많은 시각장치를 생각해 보라. 그렇게 기술로 구축된 인공의 문화를 헤아려 보라. “인간이 만든 구조물인 제2의 자연은 서정적 실체성을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자연은 더 이상 내면성을 일깨우지 못하는 경직되고 낯설게 된 의미의 복합체, 즉 이미 죽어버린 내면을 모아 놓은 시체실이다.”(루카치) 주체는 영혼을 상실하고, 감각적인 존재로 육화되는 순간이다. ‘육체’가 발견되는 것이다. 이때부터 경험의 담지자는 정신에서 육체로 갈아타며, 권력도 때맞춰 훈육의 대상과 방법을 달리 한다.

<지각의 유보>는 이 같은 관심을 이어가는 후편이다. 그런데 똑같진 않다. 흥미롭게도 ‘시각’의 문제에 매몰되면 안 된다고 강변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바꾼 것일까.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시각만을 전문화시켜 다룬다면, 사회・정치・문화・경제・예술・심리 등등 복합적 힘들을 분석하지 못한다. 분화는 전체를 전망하지 못하게 한다. 둘째 문제의 지평을 시각 너머로 확장시킨다. “나는 ‘지각’이란 문제용어를 활용해 주체의 규정방식을 지적할 생각이다.” ‘지각perception’을 핵심개념으로 삼은 까닭은 분명하다. “시야의 단일한 감각 양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또한 청각과 촉각을 통해서, 가장 중요하게는 ‘시각연구’에서 거의, 아니 전혀 분석되지 않았던 환원불가능한 혼합된 양상을 통해서 규정할 것이다.” 일찍이 정신과 세계를 잇는 투명한 가교interface였던 ‘시각’은, 육체가 정신을 갈음하는 순간 제 역할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시각문화를 통해서 주체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샅샅이 추적하는 크래리로서는 길잡이 개념을 확장시키지 않으면 안 됐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육체와 지각은 짝패로 확립된다. 

그러면 이 짝패가 등장한 시기는 어땠을까. 크래리가 보기에 19세기는 인간의 심리체계에 중대한 위기에 빠진 시대였다. “19세기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상술된 칸트의 초월적 관점과 선험적 종합범주가 꾸준히 허물어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생각해 보라. 기술문명이 본격 가동되어 대도시의 인공문명이 만개하자, “철도를 통해서 공간은 살해당했다.”(하이네) 정말로 살해된 것은 기존의 심리체계였을 것이다. 지각의 포화상태를 견딜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너무 많거나, 너무 빨라진 것이다. ‘주의attention’는 그래서 요청된다. 고장 난 심리체계를 고치기 위해서 말이다. “주의가 돌보고 제어하지 않으면, 두뇌활동은 변덕스럽고 목표도 목적도 상실한다.”(노르다우) 크래리는 주의가 작동한 역사적 단층을 분석하기 위해서 중요한 화석 세 가지를 추려낸다. 마네의 <온실에서>(1879), 쇠라의 <서커스행렬>(1887), 세잔의 <소나무와 바위>(1900). 대략 십년 단위로 끊어진다. 예를 들면, 마네를 설명할 때도 흔히 하는 대로 평면성을 문제삼지 않는다. 대신에 ‘외부externality’를 끌어들인다. “마네 발코니의 열린 덧문은 인공이 ‘자연적인 것’의 기억을 점유해 버린 세계를, 시각이 이러한 지각적으로 근대화된 현재의 정치함과 짜임새에 완전히 동조해 버린 세계를 밝혀내고 있다.”

이렇게 귀결을 끌어내 보면, 루카치가 진단했던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현미경으로 세포를 관찰하는 태도를 나무랄 수는 없겠으나, 마치 글자로 세밀한 풍경화를 그리는 것 같아서, 불편하고 불만이다. 너무 많은 분과를 오가며 장황하게 그물을 짠 탓인지, 존재하는 소실점마저 희미해 보이기 때문이다. 지식의 고고학이 아니라, 자료의 물신주의에 빠진 것은 아닐까. 경우는 다르지만, 시인의 직관은 얼마나 단순하고 명쾌한지. “큐비스트의 ‘동시적 시각’의 원리라는 것도…보다 직접적으로는 20세기초 독점단계에 이른 자본주의의 ‘관리된 세계’ 속에서 원자화되고 파편화된 개인의 분열증에 다름 아니다.”(황지우)


글. 김상우[앨리스온 편집위원]



목차


Acknowledgements

Introduction


One  Modernity and the problem of attention

Two 1879 : Unbinding Vision

Three 1888 : Illuminations of Disenchantment

Four 1900 : Reinventing Synthesis

Epologue 1907 : Spellbound in Rome


Bibliography

Illustrations Credits

Index


서적정보 / MIT Press

https://mitpress.mit.edu/books/suspensions-perce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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