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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

최근 우리의 현실을 이렇게 적시하는 말이 또 있을까. 이 테제는 키틀러(Friedrich Kittler)의 기술결정론적 주장을 함축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를 유명하게 만든 말이기도 하다. 미디어는 우리를 반영하고 투과하며 동시에 확장시킨다. 특히 근대에서 현대로의 진입의 문턱에서 기술 미디어에 의해 영향받지 않는 분야는 찾아보기 힘들다. 키틀러의 "기록시스템 1800-1900"은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현실이 미디어가 제공하는 정보시스템의 진화에 어떻게 연동되어 변화되었는지를 분석한다. 키틀러는 기술-미디어에 관한 관심으로부터 독창적인 미디어 학자로의 지위를 확립하지만, 이후 '음악과 수학 I. 헬라스 1:아프로디테'와 ‘음악과 수학 I. 헬라스 1:에로스’를 발표하며 유럽 문명사에 관한 보다 전체적인 관심을 표명한다. 다만, 그의 이러한 시도들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어 (2011) 중단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사실이다. 이 때문인지 국내에는 키틑러의 서적과 연구가 많이 소개되지 못하였다. 그의 사망과 더불어 2011년 “광학미디어"가 번역-출판되었고, 이후 그의 미디어론의 핵심을 관통하는 "기록시스템 1800-1900"이 2015년이 되어서야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2011년 출간된 "광학적 미디어"는 1999년 베를린 훔볼트대학교에서 진행한 동명의 14회분 강의를 바탕으로 하는 책으로서 미디어가 단순히 인간의 의사전달의 표현수단이 아닌 우리의 사유와 존재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라는 그의 미디어에 대한 입장이 잘 나타난다. 그러나 보다 상세하게 미디어의 변화에 따라 우리의 현실의 궤적을 추적하는 방식은 이 책에서 드러난다. "기록시스템 1800-1900"은 키틀러가 1982년 독일문학사 전공 교수자격취득 논문으로 제출한 것으로 2년 가까이 계속된 심사를 통해 통과된 논문이다. 여기에 1986년 미디어 기술의 실증적 역사에 대한 추가 연구를 바탕으로 본문의 1900년경 파트를 확대-재구성하여 ‘축음기 영사기 타자기 Gramophone, Film, Typewriter’를 출간하였다. 

책의 후기에서 언급되어 있지만, 그가 사용한 ‘기록시스템 Aufschreibesystem’이라는 단어는 '임의의 문화에서 유의미한 데이터를 송부, 저장, 처리하는 기술적-제도적 네트워크'를 지칭하는 말이다. 다분히 광의적이고 또한 그러기에 모호할지도 모르는 이 개념으로 키틀러는 유럽(독일) 문화 및 문학사를 정보시스템의 변천이라는 관점에서 재구성한다. 특히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1800년대와 1900년대의 문화사회적 요소들을 분석하여 기록-미디어적 특성들에 기입한다. 첫 번째 파트에서 키틀러는 ‘어머니의 입’을 중심으로 미디어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여성에 주목한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1800년식 기록시스템에서 자연은 ‘불가능한 이상적 여성’이며 그 기능은 인간들, 즉 남성들을 언어로 이끄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1800년 전후로 어머니들의 가정교육이 기초적인 사회와 기술의 입력 단계로 기능했다는 사실을 토대로 한다. 이를테면 어머니들을 담론의 원천에 위치시킴으로서 고전주의-낭만주의의 언어, 즉 시의 생산을 뒷받침하는 기본 조건으로 상정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키틀러는 바이에른 공국의 교회 장로이자 장학관이었던 슈테파니의 음성학적 방법(음성학적 읽기 교습법)이 전통적인 언어 습득의 규칙 자체를 파괴하였다고 언급하며, 문자에 대한 ‘읽기’의 문화에서 배제되었던 여성, 즉 어머니의 목소리가 단순한 발화 체계가 아니라 진정한 기록시스템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기록시스템 1800-1900>의 독문판 및 영문판



다만, 키틀러 자신은 문학을 일종의 미디어로 해석하고 문학을 둘러싼 정치적,학문적,기술적 제도 자체를 광범위한 미디어 시스템 또는 ‘기록시스템’으로 읽어내기 때문에 이 책은 글쓰기로 대변되는 문학의 성분 분석과 텍스트 자체에 대한 접근으로서 문학의 미디어적 기능이 아닌, 미디어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하는 발견론적 시도에 가깝다. 1900년경에 들어서는 대목에서 그는 ‘어머니’가 다수의 여성으로, 육체화된 알파벳 학습이 기술적 미디어로 대체되는 상황을 추적하며 이전의 가치들이 해체되었음을 선언한다. 이 변화의 시작을 니체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어쩌면 키틀러에게 있어 당면한 과제였을지 모른다. 그는 미학을 파괴한 자로서 니체를 주목하며 그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언급한 글쓰기의 변화된 지점을 인용한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은 글을 쓰는 행위자에서 거꾸로 글이 쓰인 표면으로 바뀌어버렸다고 증언하는데, 키틀러가 보기에 니체 역시 타자기로부터 변곡점을 그리며 그 자신의 사유와 글이 ‘논쟁에서 경구로, 사고에서 말장난으로, 수사에서 전보문 스타일로 변하였다고 진단하기 때문이다. 즉, 1800년식 기록시스템은 비분절적인 최소 기의에서 유기적으로 확장되어 실제 언어의 의미에 이르는 일련의 연속체를 구축했지만, 키틀러는 1900년대에 와서 이러한 연속을 단절이 대체한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단절이 상징하는 바, 즉 새로운 미디어에 의한 기호들의 분연속적 분리, 혹은 공간적 식별이다. 

혼돈과 간격의 논리는 타자기가 발명되면서 1900년식 기록시스템에서 기술적으로 구체화되며, 광학적-음향학적 혁명을 초래한 영화와 축음기라는 미디어는 감각 데이터를 기술적으로 기록할 수 있게 만들면서 기록시스템은 전면적으로 변화한다. 키틀러는 주술적 ‘미디어’와 기술적 ‘미디어’의 차이는 없다고 주장하며 미디어의 영역을 무의식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점에서 미디어가 이전까지 기록할 수 없었던 우리의 실재를 기록하고 담론을 재규정한다고 주장하며 키틀러의 기록체계-미디어 분석에 있어 가장 흥미로운 정신분석학적 차원의 연결을 시도한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1900년대의 미디어, 즉 축음기와 실재계, 영사기와 상상계, 타자기와 상징계의 연동의 흔적이 드러나는 것이다. 다만, 이 부분은 이후 기록체계 1800-1900의 후반부를 확장시켜 본격적으로 20세기 미디어 시스템의 구성을 살핀 "축음기 영사기 타자기"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키틀러는 1982년 방문교수 자격으로 처음 캘리포니아에 방문하며 대항문화적인 컴퓨터 운동을 지켜보며 그의 관심분야를 문학에서 미디어로, 문화에서 기술로 이동시키는데, 이러한 관점의 변화가 후기작에서 보다 더 강력하게 드러나는 셈이다. 

키틀러는 하이데거를 인용하며 19세기를 “극도로 모호한 세기”로 규정한다. 1800년경의 보편화된 알파벳 학습으로부터 1900년경의 기술적 데이터 저장장치에 의한 기록시스템의 변화는 이전까지의 문자와 담론의 그리고 그것의 사용자와 수용자의 위치를 새롭게 전이시키며 불연속적 흐름을 다시금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러한 장치로서의 미디어에 주목하는 것보다 과거의 문학을 일종의 미디어로 치환하여 분석한다. 또한 역자가 ‘해설’ 파트에서 밝히고 있듯, 권력과 지식의 교차를 통한 특정 유형의 주체들을 생산하는 혼성적 배치라는 점에서는 푸코의 ‘장치’ 개념과 유사하다. 따라서 이 책을 미디어 미학의 직접적인 해설서 혹은 구체적인 미디어-기술에 대한 접근서로 이해하기보다는 해당 시기 사회적 제도와 미디어의 재해석서이자 일종의 정보시스템 분석서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글. 유원준 (앨리스온 편집장)




책 정보 : 기록시스템 1800·1900 (Aufschreibesysteme 1800.1900)



저자 및 역자소개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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