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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2017년 2월 5일에 앨리스뷰에 게재된 "왜 우리는 사운드아트를 감상하는가?" 에 대한 코멘트 리뷰입니다.




칼럼의 논지


“우리는 왜 음악을 듣는가?” 라는 질문은 음악적 가치의 본질을 건드리고 있다. 왜냐하면 이는 청중으로 하여금 음악 감상의 목적과 그것을 달성했을 때 얻는 유익함이 무엇인지 묻고 있기 때문이다. 음악이 작곡가 혹은 연주가의 단독 행위가 아니라, 청중과의 상호작용임을 감안했을 때 더욱 그렇다.


그런데 “우리는 왜 사운드아트를 감상하는가?”라는 질문은 이보다 더 심오하고 진지할 수 밖에 없다. 이는 이 장르의 작품들이 주로 서로간의 연관성을 파악하기 힘든 시,청각 자료들을 소재로 삼으며 이를 청중에게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전개한다는 점에 있다. 그러므로 청중은 자신의 기존 감상 방식이 무용하다고 느끼며, 자신이 잘 감상하고 있는지 등의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저자는 전통적인 청중의 음악 감상 태도를 ‘감정의 고양’, ‘의미 찾기’ 두 가지로 구분하며, 사운드 아트의 경우 감정적 고양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예컨대 우리는 단순 비트를 들으면서도 절로 발 박자를 맞추는 등 감정적으로 예민한 존재이지만, 사운드 아트는 유독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음악이기에, 감상 직후 ‘뭐지 이건?’과 같은 불편함만이 남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운드아트의 감상적 가치는 오로지 ‘의미 찾기’와 관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의미 찾기’의 과정에 대한 서술은 꽤 독창적이다. 저자는 사운드 아트 작품의 난해함 때문에, 감상 과정 혹은 그 직후에는 적절한 ‘의미 찾기’가 발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의미 찾기란 공연장을 나가 일상세계의 사건들과 마주하면서 완성되는 것으로, 감상 동안에 몰입보다 거리감을 경험한 청중들이 추후에 세계를 보다 이질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그 골자이다. 


요컨대 이 글은 ‘예술 감상의 태도’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면서도 이를 감상자의 상식적인 눈높이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사운드 아트’의 감상 목적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이 인상적인 칼럼이다.


두 가지 질문


그러나 필자는 저자가 전개한 논의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었다. 본 논평문은 다음 두 질문과의 연관 속에서 전개된다. 각각의 소제목과 해당 질문은 서로 대응된다.

1. 칼럼의 저자가 제시한 의미 찾기는 과연 가능한가 혹은 그 의미찾기의 방향은 적절한가?

2. 사운드 아트 감상에서 과연 감정의 고양과 의미찾기는 독립적인가? 



1. 의미 찾기의 가능성에 대해


칼럼의 저자는 ‘의미’의 두 가지 용례를 칼럼 전문에 걸쳐 혼용하고 있다. 우리는 의미를 ‘작품을 통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바’ 뜻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는 특히 미학적 담론에서 주로 사용되는 용례이다.


“우리가 전시장에서 <샘>을 감상하는 이유는 공산품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뒤샹의 주장이 예술사적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작품 보다, 그 안에 있는 의미를 감상하는 것이며 때로 그것이 골치 아프게 한다.”(칼럼 中)


또한 우리는 주로 언어사용의 측면에서, “어떤 개념(혹은 단어 등)이 지시하는 것(reference)과 그 개념의 실제 뜻(sense)”의 맥락에서 ‘의미’란 개념을 사용한다.(이 정의는 철학자 프레게의 정의에 따른 것이다.) 


애초에 의미 찾기가 힘든 이유는 관객과 아티스트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티스트는 관객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말하고 관객의 언어 체계와 호환이 불가하다. 관객은 아티스트의 언어를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칼럼 中) 


문제는 일상에서 이 두 용례를 혼용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예술의 담론에서는 그것이 불필요한 오해와 현상의 왜곡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우산’이란 단어가 개별적인 우산 모두를 지시함과 동시에, “비를 막기 위해 사용하는 비닐과 쇠로 만든 물건”의 뜻을 내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두 조건이 모두 충족되어야지만 우리는 다른 이들과 ‘우산’이란 단어를 두고 소통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은 한글 “우산”이든 영어 “umbrella”든 모두 동일하다. 


칼럼에 등장한 랑시에르의 ‘번역’사례는 이러한 언어적 ‘의미찾기’를 설명하는데 효과적이다. 예컨대 프랑스어를 모르는 한국인 아이들이라고 하더라도 특정 언어의 단어의 지시체 및 센스를 다른 언어의 단어를 통해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누가 지도하지 않아도, 그 언어의 자발적 습득이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술 작품의 경우는 이와 사정이 다르다. 만약 우리가 언어적 ‘의미찾기’의 조건을 예술 작품 감상의 경우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청중은 작가와 아무것도 소통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작가의 표현의 산물인 예술작품 속에는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reference), 무엇을 뜻하는지(sense) 어떠한 정보도 드러나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사운드아트만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 일반의 경우에 모두 통용되는 문제다.


물론 연주자가 ‘도미솔’을 동시에 연주할 경우에 우리는 “그것이 c메이저 코드이구나”라고 인식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를 인지하는 것이 곧 작가가 표현한 것을 인지한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이를 부정한다면 우리는 “모든 작품의 경우, 작가가 의도한 것은 곧 음악적 형식일 뿐이다”는 명제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사운드 아트의 경우에는 이 문제가 더 복잡해지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기존의 음악적 형식의 틀을 벗어난(또는 벗어나려고 하는) 장르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작가와 언어적으로 소통하기 위해 유일하게 기대곤 했던 ‘음악적 형식’이란 게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사운드 아트에서의 소통은 철저하게 비언어적이며 반성적인 방식이 되어버릴 수 밖에 없다. 일상에서는 언어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명확하게 단어의 뜻을 인지하며 이를 상대와 공유할 수 있다. 그러나 사운드 아트에서의 소통은 그것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야 반성적으로 그 뜻을 찾아갈 수 있을 뿐이다. 즉 무언가가 전달은 됐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주관마다 다르게 파악하며, 그 추론의 방향 역시 자의적이다. 이를 소통이라 부를 수 있을까?


칼럼의 저자가 제시한 방법도 넓은 의미에서 ‘자의적 의미찾기’에 불과하다. 일상세계의 사건들과의 마주침 속에서 그 의미가 형성된다는 주장은, 저자의 표현대로 “자의식의 확장”일 뿐이다. 이는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지시체와 그 뜻을 객관적으로 제시할 수 없기 때문에, 결코 소통일 수 없다.


그러나 예술(특히 음악)은 형식 이상의 것이며, 우리는 음악적 형식을 모르는 이들도 충분히 예술을 향유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고 배워왔다. 이랬을 경우에 우리는 언어적 용례와는 다른, 미학적 용례에서의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미학적 ‘의미’는 특정 개념의 지시체와 뜻의 공유를 목적으로 하는 개념이 아니다. 주관에 주어진 정서, 이미지, 느낌 등을 시작점에 두고, 어떻게 음악을 듣고 이런 감정이 생기는가? 이는 음악작품, 나아가 작곡가(혹은 연주자)의 의도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의 문제이다. 즉 양방향적 소툥이 아니라, 주관과 객관이 분리된 상태에서 전자가 후자를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 된다. (이는 현재 음악미학에서도 활발히 논쟁되고 있는 주제이며, 이 글에서는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음악을 듣고 나서 청중에게 생긴 그것, 곧 최초의 감정이 중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해야만 의미 찾기의 실마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정과 의미찾기는 분리될 수 없는 일련의 연속적인 작용이다.  


2. 단절이 곧 소통이 될 수 있는 음악


우리는 음악을 들으면서 대개 특정 종류의 감정을 느낀다. 그 감정은 칼럼 저자의 주장처럼 ‘고양될 수도’ 있고, 잠시 동안의 강한 인상만을 대동한 채 사라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사운드 아트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정확하게 어떤 상태인가?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청자들은 ‘당혹감’, ‘불안’ 등의 감정을 느낄 것이다. 이런 감정은 일시적인가? 아니면 작품을 감상하는 내내 지속되는가? 후자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딴짓을 하지 않는 한) 처음부터 끝까지 당혹감과 불안감을 느끼는 상태에서 작품을 지켜보고 있다. 이 감정은 ‘고양’될 수도 있고(당혹감이 증폭되는 형태로), 아닐 수도 있지만 엄연히 지속의 상태인 것은 분명하다. 다만 이 감정의 종류가 일반적인 예술 작품을 볼 때와 다를 뿐인 것이다.


예술사 특히 미술사에서는 청자로 하여금 이 같은 종류의 감정을 환기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는 장르가 존재한다. 이는 ‘개념 미술’이란 장르이며, 칼럼의 저자가 언급한 ‘뒤샹의 샘’과 같은 작품이 그 대표작이다. 그런데 개념미술 작가들은 왜 그런 당혹감, 불안감을 조성하는가? 이는 감상자로 하여금 최대한 눈앞의 작품이 낯설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 낯섦을 통해 우리는 “이건 뭐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우리로 하여금 그 질문으로 이끌게 하는 건 결국 우리의 감정이다. 불안감, 당혹감과 같은 불편한 감정들은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인식을 재확인하게끔 만든다. 그러므로 감정과 의미 찾기는 불가분의 연속적인 작용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나 칼럼의 저자는 이 지점에서 우리가 감정적으로 고양되지 않으니, 의미 찾기 활동에 매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우리 자신이 더 이상 작품 그리고 공연장 내에서 어떠한 정보를 얻을 수 없으므로, 일상세계로 나아가(공연장을 떠나) 의미 찾기 활동을 지속하여야 한다고 설명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개념미술의 경우, 창작자가 의도한 것은 감상자로 하여금 배경지식에 의존하지 못하도록 하여 “미술(작품)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개념미술의 모토는 “눈앞에 대상에 현혹되지 말라”이며, 뒤샹의 샘의 경우, “작품을 단순히 변기로 보지도 말고, 눈 앞의 변기에서 예술적 의미를 찾지도 말라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해, 이 지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역설의 상황에서 어지러움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곧 그들의 목적이었다.


어쩌면 사운드아트의 작가들도 이와 비슷한 의도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작가는 “작품 속에서 창작자의 의도나 작품의 내용을 짐작하지 말 것”을 선언하는 셈이다. 이는 일종의 메타적 접근을 요구하는 것이며, 결국 우리가 접해본 적 없는 그리고 인정하기 힘든 지금 이 작품을 ‘음악예술’로 받아들였을 때 발생하는 개념의 이지러짐을 고스란히 느껴보라는 의도일 것이다. 이랬을 경우에 우리의 ‘의미 찾기’ 활동은 작품 자체 혹은 작품과 접해있는 우리의 일상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이 개념적 어지러움을 고스란히 간직 한 채, 작품을 넘어선 추상적 질문 곧 ‘음악 예술이란 무엇인가?’ 을 던져보라는 것이 된다.


이상의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사운드 아트를 감상하고 난 이후의 일상세계의 재발견은 오히려 논의 밖의 대상, 곧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작품과 대면하고 있는 지금, 감상자가 느끼는 당혹감 그로 인한 ‘헛발질’ 이야말로 사운드의 아트가 본질적으로 의도하는 것이며 이는 곧 우리 자신의 의미 찾기 활동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음악이 울리는 그 장소에서 회피하여 사고할 필요도, 사고해서도 안 된다.


이는 아주 고전적인 해석으로의 회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청중의 불편한 감정을 온전히 긍정한다는 점에서, 의미찾기의 토대를 그러한 감정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필자는 아직 그 권위를 깰만한 설득력 있고 독창적인 주장을 보지 못했다. 


이상의 언급들은 분명 작가와 청중의 소통이라고 말할 순 없다. 어느 곳에서도 양방향성 소통의 가능성은 발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관의 감정도, 메타 인식도 여전히 주관의 단절 속에서의 일방적 반응일 뿐이다. 그런 측면에서 앞서 언급한 언어적 측면에서의 ‘의미 찾기’ 목적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운드 아트가 대개 비슷한 종류의 감정변화를 야기하고, 작가가 이를 때때로 노골적으로 의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그 감정에 충실한다는 것은 곧 작가의 의도를 따라가고 있다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불편한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나아가 장르의 특성을 메타적으로 살펴보는 일련의 활동이 소통의 성격을 어느 정도는 갖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일반적 의미에서의 소통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그냥 듣고, 당황한 채 공연장을 나오면 충분하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물론 “이것이음악예술이라면, 도대체 어디까지 음악이라 부를 수 있을까?”와 같은 질문들은 나아가 우리의 감상활동을 분명 더 풍부하게 만들 것이다.


글. 신정욱(동국대 대학원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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