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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대상을 바라볼 수 있다. 이 말은 ‘나’뿐만 아니라 타인들 또한 눈을 가지고 있고, 다시 말해 내가 그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바라봄의 행위는 대상을 스캐닝(scanning)함으로써 자신과 대상 혹은 타인과의 차이를 구별 지으려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이다. 이러한 욕구를 자크 라캉의 용어에 의하면 ‘응시(gaze)'라고 할 수 있다. 라캉에 의하면 응시란 거울 앞에 처음 서 보게 된 유아가 거울에 비친 모습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깨닫게 되는 시선의 환기를 의미한다. 사람은 바라보는 행위를 통해 나 자신과 대상 혹은 타인과 구별 짓고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게 해주는 매체로 영상카메라가 있다. 카메라의 대상(피사체) 앞에서 촬영기자가 직감하는 것은 바라보는 대상을 통한 자-타의 자각이다.  라캉은 응시가 주체타자 관계에 균형을 깨트리고 주체 속의 타자, 타자 속의 주체라고 말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응시를 주체와 타자의 결핍이 동시에 발생하는 위치에서 배제시킬 때 주체-타자 대립구조가 성립된다. 따라서 응시는 주체와 타자가 ‘전체(All)’로 존재할 수 없도록 한다. 한편 보는 이는 영상에서 보여지는 인물에 대해 자신을 대입하려는 욕구를 가지면서 자신이 바라보는 시선의 대상이 바로 그 자신이 된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는 응시의 과정을 겪게 된다.

  산업화된 도시 국가에서는 ATM기기, 엘리베이터, 고속도로, 건물 내부 주변에 설치된 비디오 카메라가 질서 유지의 목적으로 우리를 실시간 감시하고 있다. 혹은 응시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감시장치로부터 응시를 지각하게 되는 현상을 목격하는 현장에 서있다. 이처럼 감시카메라라는 장치덕분에 우리는 사람과 사람의 직면적인 응시체계에서 장치를 통해 응시를 확장하는 감시체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프랑스어에서 기원한 ‘감시(surcerilance)’는 ‘지켜보다’라는 의미가 있다. 여기서 지켜보다의 대상인 피사체는 보호의 대상임과 동시에 통제의 대상이다. 이처럼 자기 보호보다 타인 감시를 위한 감시카메라는 기존의 감시체계를 바꾸고 있다. 감시카메라와 마찬가지로 스트리밍 비디오 역시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그것에 대응하게 만드는 장치로, 둘 다 장치의 존재와 위치가 상대방의 행동을 조건짓는 기술인 셈이다.

  이러한 시각매체는 보는 사람과 보이는 대상 사이의 상호작용을 목적으로 작동한다. 특히 감시카메라라는 기술적 장치를 통해 어디에서나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게 됨과 동시에, 블랙박스와 웹캠의 등장으로 우리 스스로 역감시가 가능해졌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스스로 감시 대상이자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가고 있다. 그리고 기술장치에 의해 영상을 바라보는 이와 영상 안에 존재한 이의 상호적 시선의 관계를 생각해보게끔 하는 전시가 아마도 예술공간(Amado Art Space)에서 ≪날 바라보는 너를 바라보다(Staring at you staring me)≫라는 제목으로 전시가 열렸다.

  이 전시는 한-불 수교 130 주년 기념 행사중 하나로, 2월 한달 간 프랑스의 Espace Chiasma, ENSAPC Ygrec, les grands voisins 에서 진행되었다. 이 전시는  한국작가 5인 (홍성민, 한요한, 신제현, 유병서, 유목연) 프랑스 작가 11인(장-마르끄 샤푸이으(Jean-Marc Chapouille), 플뢰리퐁텐느(FleuryFontaine), 프레드 포레스트(Fred Forest), 제르멘느 위비(Germain Huby), 에릭 마이예(Eric Maillet), 장-끌로드 뤼지렐로(Jean-Claude Ruggirello), 카푸신느 베베르(Capucine Vever), 제롬 조이(Jerome Joy), 제프 게스(Jeff Guess), 루카스 드리가스(Lukasz Drygas), 얀 부가레(Yann Bougaret) & 아르노 미르망(Arnaud Mirman) 이 참여한 전시로, 오늘날 널리 이용되는 영상 매채인 웹캠, 스트리밍 비디오, 감시카메라 등이 어떻게 동시대 미술의 맥락에서 어떻게 차용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탐색으로 부터 출발한 미디어아트 전시 프로젝트이다.

   작가들은 본 전시를 위해 감시카메라, 혹은 스트리밍 비디오에 관련한 해석을 요청받았다. 본 전시의 가장 중심 소재가 되는 웹캠, 스트리밍 비디오, 감시카메라 등의 매체는 모두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게 하는 장치로, 존재나 위치가 상대방의 행동을 조건짓는 기술이라 전제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를 바라보는 너를 본다’’, 라는 전시제목은 주체가 일련의 대상이 된다는 가정과, 대상이 되는것을 인식하며 (나를 보는) 매체를 직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매체와 시선의 상호관계를 고찰하고 오늘날 미디어 환경을 사이에 둔 개개인의 삶의 방식간의 관계에 질문을 던지는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컬렉터의 초상, 프레드 포레스트, 비디오, 1974


  예컨대 프레드 포레스트는 1974년 미술품 경매에서 응찰하는 사람을 찍는 무비카메라의 필름을 경매물건으로 내놓았다. 이것은 <컬렉터의 초상> 이라는 작품으로, 작품이 낙찰되면 경매의 종료와 동시에 촬영이 종료되면서 그 필름이 작품으로 팔리는 것이다. 이것은 경매사의 시점에서 본 경매과정 자체가 응시의 대상이 됨과 동시에 경매에 참여한 응찰자들이 그 자체를 수집하기 위한 노력의 상호작용을 보여준다. 이렇듯, 본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매체의 기술적 장치들의 성격을 비롯해 그 관계와 사회적 의미, 또한 개인으로서의 반응에 대해 고찰하면서 영상매체예술의 의사소통 방식과 그 의미를 탐구한다. 그리고 그 매채를 사이에 두고 보여지거나 보는 행위의 주체가 되어 작품을 진행하면서 시시각각 벌어지고 있는 매체 너머의 허구와 존재 혹은 물질과 비물질의 문제들을 다룬다.

Mister Google, 장 마르끄 샤폴리, 비디오, 2013

  장-마르끄 샤풀리(Jean-Marc Chapoulie)의 경우, 구글 스트리트 뷰에 딸과 함께 촬영된 모습이 게재된 것으로부터 작품을 시작했다. <Mr. Google, who owns the reality?>는 자신과 딸의 얼굴이 흐릿하게 지워진 것을 발견한 작가가 구글을 상대로 블러(blur) 처리를 없애줄 것을 요구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를 위해 작가는 직접 미국으로 가서 구글과 소송을 벌이기도 하며  오늘날 구글 이라는 거대 매체와 이를 이용하는 개인 사이의 적극적인 상호관계를 이끌어낸다.


nocinema.org, 제롬 조이, 비디오, 프로그레밍, 2010

  제롬 조이(Jérôme Joy)의 <nocinema.org>는 불특정한 장소의 웹캠들로부터 캡쳐된 이미지들을 실시간으로 이어붙이면서 여기에 불특정한 배경음악과 자동 패닝 효과 등을 입혀 마치 영화의 장면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처럼 보여주는 작품이다. 역시 감시카메라와 그것의 시선을 응시하는 관객들의 시선의 관계에 영화적 맥락을 개입시킨다.


Gase toward to forbidden love, 유병서, 퍼포먼스, 사운드, 2016

  한국 작가인 유병서의 <Gaze toward to forbidden love>는 감시카메라의 역할을 하던 동물인 개가 오늘날 다른 역할, 즉 사랑의 대상이 되는 역할로 지위가 국한되어 가는지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를 위해 작가 스스로 감시 카메라가 있는 갤러리 공간 안에서 일주일 가까이 숙식을 하면서 온라인 검색에 몰두하는 퍼포먼스를 했고, 전시는 그 결과물들로 이루어졌다.


Mon Chéri, 한요한, 설치, 비디오 퍼포먼스, 2015

  한요한의 <Mon Chéri>는 내시경 카메라(endoscope)와 감시카메라, wifi, 쓰레기 더미, 오래된 사진들, 인터넷 음악 등을 이용한 퍼포먼스-설치작품이다. 그는 버려진 사물들을 내시경 카메라로 탐색하면서 동시에 세느 강가에서 구매한 타인들의 오래된 사진더미들을 헬멧의 달리 카메라를 통해 하나씩 응시한다. 영상은 중첩의 과정을 통해 가상적인 드라마를 만들어내며, 온라인에서 무작위로 추출된 음악들은 극적 효과를 배가시킨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모든 내러티브는 관객들의 시선에 의해 각각 다르게 구축된다.


StreamingDance,신제현, 퍼포먼스, 사운드, 2015

  신제현 작가의 퍼포먼스 <Streaming Dance>는 근래 상당한 논란이었던 ‘Take-Out Drawing’ 카페의 임대차 계약을 둘러싼 이슈와 맞닿아 있다. 한국의 테이크아웃 드로잉과 프랑스 전시공간이였던 갤러리 이크렉은 공통적으로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를 안고 있는 공간이다. 이 두 공간에 각각 여성 무용수가 몸에 센서를 달고 인터랙티브하게 신호를 보내는 춤이 전개되는데, 센서는 상대편 도시의 전시장에 설치된 악기들을 작동시키고 그것에 맞추어 무용수들이 계속 춤을 이어나간다. 이 작품은 감시 카메라와 스트리밍 비디오를 신체, 건축, 제도 등의 범주에서 다층적으로 해석한 작품으로, 이 과정에서 전시공간을 그대로 재현한 미니어쳐에 무용수가 직접 손을 넣어 공간을 부수고 망가트리는 모습이 전시공간 벽에 동시에 투사되며 현실의 이중적인 시간들의 중첩을 보여준다. 또한 아마도 예술공간 전시 오프닝에 행해졌던 퍼포먼스에서는 프랑스인들은 전혀 먹지 않는 낙지를 이용하여 결국은 두 나라간의 교류전에서 얼마나 두 문화를 이해하기 힘든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본 전시를 구성하는 작품들은 전시제목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상호적 시선의 관계를 특별히 다룬다. 따라서 메세지를 전달하거나 네러티브적인 구조보다는 매체의 특성을 강조하는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작가의 일련의 퍼포먼스 혹은 연구과정을 따라가며 “보여”주거나 (유목연, 장 마르끄 샤푸이으) 또한 영상의 촬영주체와 촬영대상의 동시성의 질문을 다루기도 하고 (얀 부가레& 아르노 미르망) 작가가 주체와 객채의 양쪽 자리에서 서로를 상호하기도 한다. (유병서, 제롬 조이) 혹은 시공간적 유연성을 조율하기도 하며 (신제현), 존재와 가상을 시각적으로 재현하거나 (플뢰리 퐁텐드, 카푸신느 베베르), 동시대 미디어 환경을 이용해 무한한 가상의 여정을 기록하기도한다 (루카스 드리가스). 또한 시선을 파편화 시키는(한요한) 등. 각각의 매체의 속성을 극대화시키며 작가 개개인의 매체에 대한 해석을 보여준다. 또한 두 나라의 작가들이 매체를 접근하는 방법에서는 어느정도 차이를 엿볼 수 있는데. 참여한 프랑스 작가들의 경우 90년대부터 활발히 작업하며 데이터를 기반으로 인터넷 매채를 주로 사용하며 오래 활동해 온 작가들로 초대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장치에 대한 개념적 접근과 작품의 내용이 비평적으로 많은 담론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 명확하게 보여졌다. 반면 한국 작가들의 작품들은 장치에 대한 메커니즘을 단초로 작품을 하기보다는 한국 미술계 내부에서 볼 수 있는 시대담론의 내용적인 부분이 더 선명하게 보여진다는 차이가 보인다.


  이번 전시로 인하여 한국 작가들이 파리 대안공간 세 군데에서 전시를 했다는 점은 큰 성과로 꼽을 수 있다. 팔레 드 도쿄와 같은 대형 전시공간은 오히려 기관 대 기관이라는 측면이 강해, 국가대표선수급 작가들을 보내는 방식으로만 진행이 되기 때문에, 키이스마와 같은 대안공간에서부터 인지도를 쌓는 것이 젊은 작가들에게는 실질적으로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동시대 미술이나 미디어 아트에 대한 국내의 지원이 원활하지 못한 가운데에도 파리에서의 전시가 큰 호평을 받으며 프랑스 문화원 (Institut français) 으로부터 추가적인 예산지원을 받게 되어 서울에서의 전시까지 이어지며 마무리 되었다.

  이번 전시의 주요 주제이자 매체인 감시카메라와 스트리밍 비디오의 경우 모두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고, 시선에 맞대응하여 행위를 촉발시키는 장치다. 이런 매체중심의 요소를 포함하는 전시제목은 시각매체에 의해 바라보는 이의 위치와 바라봄의 대상이 되는 이를 동일 선상으로 놓고, 각자가 지니는 시선의 의미 두 가지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전시내용과 부합하는 전시라 할 수 있겠다. 미디어아트 전시는 작품에 사용된 다양한 전자기기의 메커니즘과 그것을 둘러싼 이론과 해석들과 같은 사전지식을 필요로 한다. 미디어아트 작품 특성상 기존의 회화, 조각 작품의 서사성보다는 현상이나 감각, 지각에 집중하기 때문에 미디어아트에 익숙치 않은 관객이 대면했을 때 온전히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힘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작품의 제작, 시기, 기술적 특징,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작품설명을 유심히 보아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전시에서 매우 필요했던 작품 설명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난해한 영상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 옆 벽에 걸린 손바닥만한 캡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작가들이 사용한 다양한 장치 매커니즘이 무엇인지, 작가가 주목한 지점이 무엇인지 등 낯선 미디어 장치로 이루어진 작품을 시원하게 해소시켜 줄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홈페이지나 전시서문이 적힌 페이퍼에 적힌 글도 매우 간략하여 전반적인 정보의 전달과정이 불친절했다는 느낌이 강했다. 매체를 주제로 한 전시는 여타 다른 전시보다 작품에 관한 설명이 더 제공될 필요가 있다. 그러한 기반 정보와 함께 전시 자체를 아우르는 개념과 작품의 배치흐름에 따른 전시 전개과정, 그리고 오늘날의 기술 환경과 우리의 일상 방식과의 관계를 비교하며 바라보는 것이 전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벤담은 인간의 신체에는 가장 적은 고통을 가하면서 인간의 정신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처벌로 ‘판옵티콘(Panopticon)’ 개념을 제시했다. 처음에 이번 전시제목을 듣고 역판옵티콘이라는 개념이 연상되었다. 전시제목에서 드러나듯, 이제 피감시자와 감시자는 서로의 위치를 바라보며 동등한 선상에 서 있다. 이처럼 감시 비디오 기술의 탄생 이후 비디오 장치를 매개로 관객은 자신의 신체를 노출시킨 피감시자이자 응시하는 감시자로서의 위치를 동시에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피감시자와 감시자가 서로를 바라보며 새로운 시선의 관계, 즉 상호작용하는 커뮤니케이션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다소 긍정적인 관계전환으로 읽혀진다. 피감시자가 감시자의 감시형태를 거부할 수도 있고, 감시자에게 몸짓대화를 거는 등의 방식으로 일방적인 감시를 거부한다.

또한 비디오 카메라는 그것의 시선을 통해 관객이 자신의 현존을 의식하게끔 한다. ‘보다’와 ‘보이다’의 관계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 시각기계를 통한 이미지 안에서는 관객의 신체, 신체의 비디오 이미지, 신체의 거울 이미지가 연달아 교차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서 관객의 정체성은 다양한 층위로 분열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 보여준 바라봄의 문제는 감시권력에 처한 관객의 모습에서 벗어나 피감시자가 감시자의 시선 봉합을 깨트리고 ‘보다’와 ‘보이다’의 구별을 뒤엉키게 하며 서로 간에 반응을 유발하는 상호작용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전시는 감시라는 행위를 인식하게 하는 시각매체를 중심으로 접근한 전시라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전시제목에서부터, 감시, 역감시, 상호작용 등 다룰 수 있는 이야기 범주들이 꽤 많아보인다. 전시를 기획하면서 만들어진 한불 통합 사이트링크(http://www.staringatyoustaringatme.com/)에 들어가면 다양한 매체를 사용한 작품이 이번 릴레이 전시에 참여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파리는 세 곳에서 전시를 한 반면, 서울에선 한 곳에서 이뤄진 탓일까. 전시 주제의 흥미로움을 다 담아내었다고 보기는 힘들었던 것 같다. 우선 참여한 프랑스 작가들의 경우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작품들이 많이 있었다. 인터넷 매체를 사용하는 작품들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볼 수 있도록 친절하게 키보드와 마우스가 놓여있기도 했다. 그러나 비전공자에겐 외계어 같은 알고리즘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다루는 방법이나 번역, 주의사항도 알 수 없어 박물관에 박제된 오브제처럼 감상할 뿐, 작품 프로그램 내부를 감상할 수 있는 관객들이 몇 되지 않아 보인다. 인터넷 외에 영상작품의 경우 해드폰에서 프랑스어가 나오고 있는데, 자막이 전혀 없었다. 자막 없이 영상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또 비디오 카메라 중 감시 카메라라는 속성을 활용한 작품들을 이 전시에서 볼 수 있었는데 단순히 매체를 사용하기 때문에 전시에 포함된 작가도 있어 보인다.  

이처럼 매체자체를 중심으로 인간을 둘러싼 동등한 주체의 위치 혹은 시각에 의한 위계와 체계를 조망하는 전시는 동시대에 존재하고 있는 매커니즘을 발견하고, 새로운 해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우리의 사회망을 환기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와 같은 전시는 정보와 이미지를 전달하는 매체 개념 외에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하고, 그러한 방향으로 전시를 이끌어낼 수 있는 시점이다. 미디어아트의 스펙트럼이 서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다양하지 못하다는 점을 보안하여 국내에서는 다양한 영상기반 매체를 활용하는 전시나 작품들이 더 활성화되어야 한다. 또 그러한 전시와 작품들 속에서 다양한 해석에 대한 장을 열어주어야 한다. 따라서 매체가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까지 사유할 수 있게 한다는 말이 과하게 이상적이지만은 않은 듯하다.


글. 유다미, 김소현 (앨리스온 수습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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