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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는 혁명을 통해 획득된다. 빨주노초파남보만 있는 세계에 연두색이 불쑥 “나도 색깔이다.”라고 외치며 의미를 찾는 싸움. 의미망 안에 들어오지 못한 무의미한 존재들의 의미 찾기.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사실 존재 조차 알지 못했던 그들의 아우성을 있는 듯 없는 듯한 엠비언스 정도로 여기며 흘려 보냈던 존재들. 앞만 보고 걷다가 넌 도대체 무슨 소리를, 왜 하고 있었던 거냐며 그제서야 머쓱한 생각에 뒤돌아보게 하는 그 소리들. 아르코 미술관, <혁명은 TV에 방송되지 않는다>에 있었다.


<헤바 Y 아민 _ 스피크2트윗, 옛날TV 5개 + 전화기>


예를 들어, 헤바 Y 아민 작가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준 소리와 같은 것이다. 이집트 당국이 폐쇄한 인터넷을 대신해 개발된 <스파크2트윗>을 통해 이집트인들은 음성 메일을 교환하고 전화로 자신의 메시지를 남길 수 있었다. 그 소리는 마치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닿기 위해 달리는 마라토너의 고된 헐떡임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메시지가 공중분해 되지 않기 위해 누군가의 수신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 같은 것이다.  난 여기서 헤드폰이 아니라 수화기로 그들의 말을 들었다는 점에서 동요를 느꼈다. 그 수화기는 들을 수는 있지만 내 말을 전달할 수 있는 마이크가 없었기 때문이다. 듣고 말하기가 양립 불가능한 절름발이 수화기는 이집트인들이 처한 열악한 환경과 정부의 폭압을 체감시켜주는 대리물 이었다. 말할 수 없는 수화기의 깨진 균형이 푼크툼처럼 한쪽 가슴을 찔렀다. 


<김영섭 _ ruhe bitte!(조용히 해주세요)>


김영섭 작가의 <ruhe bitte>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소리 없는 스피커다. 소리만 없을 뿐, 마치 소리가 나는 것처럼 스피커는 일정한 박자로 박동했다. 박동하는 스피커는 수술대 위에 가만히 누워 있는 환자의 가슴팍 사이로 뛰는 심장 같았다. 소리 없는 스피커의 아이러니함과 들썩거리는 스피커의 박동은 오히려 사운드의 이면을 연상시킨다. 말하고 싶으나 말할 수 없는, 마치 입을 틀어 막힌 혁명의 소용돌이처럼, 분출되지 않은 채 잠재해 있는 거대한 에너지의 약동 같은 것 말이다.


난 그것들이 사운드의 잔해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의 발걸음에 조각난 길바닥 찌라시들처럼, 포섭되지 않고 공중분해 된 소리라고 생각했다. 파레틴 오렌리와 방준석 작가의 <소리 없는 메아리>처럼 공중을 부유하며 울리다 결국 공기 중에 파묻혀 버려지는 말들이나, 양아치 작가의 <츄우 츄우 촘프 촘프>에서 희미해 져버린 혁명의 발자취를 지지직 거리는 사운드로 복원한 음향이나, 크리스토프 미곤과 말라 흐라디의 <스트라이크>처럼 쿵! 벽을 치고 점차 사라지는 단발의 타격 음들은 깨야 할 껍데기에 부딪혀 쓰러져간 수많은 소리의 시체 더미처럼 전시장 안을 층층이 쌓았다. 과연 그 소리의 주인공들은 껍데기를 부수고 승리의 깃발을 꽂았을까?


<크리스토프 미곤+말라 흐라디 _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에서 마이크는 벽을 쿵쿵 친다. 벽을 때리는 뭉툭한 마이크 소리는 뼈대가 훤히 보이는 앙상한 키네틱 철골 구조와 대비를 이뤄서 사운드의 효과를 배가했다. 일정한 주기로 삐거덕 거리며 벽을 치는 스트라이크에서, 하늘로 팔을 높이 흔들며 혁명을 외쳤던 수많은 사람들의 반복적인 운동이 겹쳐 보였다. 김기철 작가의 <마트료시카>도 반복을 매개로 혁명을 드러낸다. 이 작품은 피보나치 수열로 디자인된 목조 구조를 통해 점진적으로 발현하는 혁명의 사운드를 시각화했다. 목조 구조 중심에 선 확성기의 소리는 점차 퍼져 나간다. 작가는 <마트료시카>라는 이 작품의 타이틀에서 알 수 있듯이 러시아인형에서 영감을 얻은 듯했다. 혁명은 작은 곳에서 시작하여 크게 퍼져나가는 모습을 러시아인형과 피보나치 수열로 표현했다.


<김기철 _ 마트료시카>


<마트료시카> 확성기가 내는 소리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이미 시간과 공간이 다른 세계에서 울려 퍼졌던 혁명의 소리는 2018년 대한민국에 사는 ‘나’에게 어떻게 재맥락될까? 이미지는 2차원 표면에 머무르고 정지된 채 아이 컨택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면 사운드는 3차원 위에서 자신의 주인을 찾기 위해 타인의 귀를 두드린다. 겹겹이 쌓인 잔해 더미에서 힘겹게 들리는 신음처럼, 소리는 다시 자신을 들어달라고 말한다.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는 그 소리는 이제 유령처럼 공간을 떠돌면서 자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던 시공간으로 우리를 소환한다.   


   

                                            <파레틴 오렌리+방준석 _ 소리 없는 메아리>


그 소리가 혁명에 성공한 영광의 소리든, 혁명에는 비록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수없이 깨져버린 소리의 시체든, 혹은 실패한 혁명의 비명 소리든, 난 이 전시가 들려준 많은 혁명의 카테고리가 적어도 나에게 유의미한 혁명의 소리는 무엇인가로 귀결되어야지 완성된 전시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은 결국 우리에게, 나에게 ‘혁명’은 어떤 의미인가로 반문된다. 권병준 작가의 <오묘한 진리의 숲>은 그 물음에 대한 답처럼 들렸다.


<권병준 _ 오묘한 진리의 숲>


LPS 장치로 이뤄진 헤드폰을 끼고 전시장을 옮겨가면, 위치에 따라서 통기타 선율의 음악이나 물방울이 떨어지는 자연의 소리,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광장의 구호 소리 등이 들린다. 90년대 혁명의 이상이 몰락해버린 시대를 살았던 작가의 내면에 나부끼는 바람들이 고스란히 녹음된 것이다. 난 그 소리가 지극히 개인적인 소리라는 점에서 사회적 혁명과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마트료시카>가 보여준 러시안 인형의 마지막 인형처럼, 바로 그 내면의 소리가 발산의 시작이었다는 점과 혁명의 주체와 대상이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이 이 전시의 시작과 끝처럼 느껴졌다.    

  

난 이 전시가 세련된 완성도를 보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운드를 매개로 흘러간 과거를 현재로 소환하며 동시대인들에게 유의미한 질문을 던졌다는 점에서 꽤 의미 있는 전시였다. 그것은 작품 자체로 완결된 논리적 구성으로 이뤄지기 보다, 사운드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공간을 아우르는 여백을 남겨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 뭉텅이가 비어있는 여백은 관객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의 몫으로 이 전시는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글.임태환(앨리스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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