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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이치 구로카와・히로시 마토바・반성훈의 <노드 5:5> : 감각의 블랙박스 _AliceOn_Archive

로아 2017. 6. 27. 19:49



0. <노드 5.5>는 아시아문화전당 창제작센터 <키네틱 미디어랩>이 2016년 선보인 작업이다. 이 작품은 몇 가지 측면에서 10년 전 매체예술의 전성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첫째 대형기관이 지원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이며, 둘째 그에 따른 상당한 예산을 투입한 작품이다. 주지하다시피, 매체예술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인기를 끌었던 만큼 빠르게 수그러들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노드 5:5>는 매체예술의 성격을 다시금 환기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매체예술에서 기술은 무엇인가, 기술적 숭고는 어떠한 의미인가.


1. 오랫동안 기술은 크기를 지향했고, 역사적으로 기술의 성과는 크기로 가늠됐다. 건축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고딕건축이 돌로 만든 날개(부벽)를 통해서 부상하려고 했던 것을 기억하자. 질료의 한계는 언제나 돌파의 대상이었고, 크기는 그것의 증거였다. 이러한 양상이 물질의 세계에서 발행하는 한, 이것은 외재적 지향일 것이다. 외부의 세계에 분명한 형태를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까지도 이러한 흐름은 유효했다. 현대의 기술은 특히 과학과 결합하면서, 이전과는 질적으로 우월한 도약을 이루었다. 석조건물이 정연하게 늘어선 파리의 거리에 매끈하고 장대한 철골구조물 에펠탑이 우뚝 섰을 때는 이질적이다 못해 괴이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파리시민의 원성이 자자했던 것은 당연했다. “아무리 에펠탑이 육중한 조형물이라고는 해도…잡다구리한 물건 같다는 것이야말로, 19세기의 가장 유명하다는 이 구조물의 특징으로서,…이 시대의 2류 예술적 감성이 일반적으로 장르 틀거리와 선조세공 기술 내에서만 사유할 수 있었다는 점을 방증한다.”(에곤 프리델Egon Friedell) 이러한 기술의 외재적 지향이 극한으로 전개되는 곳은 아마 우주일 것이다. 문화예술이 시대의 평균적 상상력을 보여준다면, 초창기 영화와 과학소설이 광활한 우주를 무대로 모험을 펼치는 장대한 서사를 묘사했던 것은 당연했다. 그곳은 유한한 존재 인간이 극복해야 할 최후의 한계이자 무한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기술은 신체의 확장으로 간주됐던 만큼, 기술적 사물의 크기는 성공의 명확한 지표였다. 


2. 이러한 측면에서 봤을 때 디지털기술은 이단처럼 보인다. 작은 것을 지향하며, 내부로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기술적 진보의 벡터와 상반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외재적 경향과 내재적 경향이 동시에 출현했다는 것이다. 외부로 향했던 미사일과 내부로 향했던 진공관은 두 경향의 근원일 것이다. 그리고 후자는 20세기 초반 앨런 튜링이 일치감치 기본적인 모형을 완벽하게 구성했다. 그것이 유명한 튜링기계며, 현대의 컴퓨터의 원형이다. 이렇게 작게 내부로 향하는 기술은 라디오, 비디오, 텔레비전 등, 이후 차례로 각종 매체로 확장되며, 다양한 변종이 등장·했다. 미술 역시 즉각 반응했고, 전위대는 이 새로운 매체를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플럭서스가 대표적인 경우이며, 알다시피 백남준은 이 경향의 선구자였다. (흥미롭게도 그는 선과 같이 내향적인 주제로 매체작업을 만들곤 했다) 문학도 늦기는 했지만 새로운 매체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과학소설은 이른바 탄탄한 과학지식에 따라 정교한 우주탐험을 묘사했던 ‘하드 SF'가 강세였지만, 어슐라 르귄 같은 작가가 등장하며 내면의 세계를 탐구하는 ‘소프트 SF’가 부상했다. 특히 1984년 발표된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스󰡕가 등장한 이후에는 이러한 경향은 강화됐다. 이 소설은 네트워크 컴퓨터로 구성된 사어버공간을 무대로 하는데, 여기서 마약과 몰입과 낙원이 결합된 기묘한 모험이 펼쳐진다. 마약에 취한 보들레르의 인공낙원의 20세기 판본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3. 진공관과 트랜지스터는 작은 세계를 지향했고, 백남준이 그랬던 것처럼 초기의 매체예술도 (그것의 실험도) 이러한 흐름에 따랐다. 하지만 매체예술은 본성상 기술 지향적일 수밖에 없다. 본격적으로 기술의 논리가 침투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일찍이 영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기술은 대규모 자본과 지원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양은 질을 바꾼다고 했던가. 그것은 장인이 혼자서 만드는 작품이 아니라, 여럿이 체계를 이루어 작업하는 ‘프로젝트’에 가까웠다. 매체예술이 본격적으로 관심을 받기 시작했을 때 미술계의 반응과 체제를 생각해 보라. 대부분 대학교의 연구소나 대형 미술관이 지원하는 체계를 통해서 작업들을 생산하곤 했다. (물론 전부가 그렇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핵심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측면은 당연히 미술계의 관례 및 제도와 곧바로 충돌했다. 수많은 인력과 자본이 어떻게 계속 투여할 것인가, 전시도 보관도 팔기도 어려운 작업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수용할 것인가. 초창기 열풍이 지나간 이후 곧바로 각종 문제가 제기됐다. 이것은 단순히 실용적 차원을 넘어서 실질적이고 개념적이고 제도적인 문제였다. 장구한 미술의 전통은 한 때의 유행 때문에 바뀌지 않으며, 미술의 개념을 완전히 바뀌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일 게다. 


4. 열풍이 지나간 이후, 매체예술은 가파르게 잦아들었다. 자본과 인력은 돈이 흐르는 곳으로 옮겨갔고, 적어도 미술계에서 매체예술은 그러한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매체예술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디자인과 건축 같은 곳으로 활동하는 영역을 바꾸었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미디어파사드가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산업과 예술의 경계에 있는 디자인과 건축은 매체의 기술과 자본의 논리를 투입하기 적확한 영역일 것이다. 그리고 매체예술을 둘러싼 이러한 흐름은 지금까지 계속된다. <노드 5.5>가 흥미로운 것은 이 때문이다. 미술계에서 매체예술이 약화된 상황에서 초창기 작업의 냄새를 짙게 풍긴다. 마치 <노드 5.5>는 고원처럼 서 있다. 물론 그때와 똑같지는 않을 것이다. 동일한 낱말도 문장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듯, 현재의 맥락에 따라 상이한 위치를 점하리라. 그래서 다시 질문할 필요가 생긴다. 매체예술에서 기술은 무엇인가, 기술적 숭고는 어떠한 의미인가. 조금 자세히 <노드 5.5>를 살펴볼 차례다. 


5. <노드 5.5>는 비디오 프로젝션, 키네틱 레이저, 모듈 웨이브 필드 신세시스로 구성되며, 프리즘에 반사되는 10개의 레이저가 움직이며 스크린을 비추면서 스크린에서 운동하는 이미지와 교감한다. 일종의 시청각적 공감각이 형성된다. 알다시피 창제작 센터 복합 1관은 높이 18m에 너비 50m의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곳이다. 어지간한 작품은 공간에 압도되기 일쑤이다. 하지만 <노드 5.5>는 전혀 눌리지 않으며 오히려 이 공간을 역으로 감각의 놀이터로 삼는다. 시각과 청각인 차폐된 곳에서 관객은 단순하나 강력한 시청각 복합감각에 포박된다. 감각의 폭탄을 맞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모든 감각이 지각의 역threshold를 넘어서기 때문에, 일종의 숭고를 일으킨다. 그런데 이때의 숭고가 조금 묘하다. 전통적 의미의 두 가지 숭고를 모두 일으키기 때문이다. 첫째 사물의 크기 자체가 제시하는 버크적 의미의 숭고, 둘째 왜소한 주체의 한계를 일깨우는 칸트적 의미의 숭고. 엄청난 크기의 복합 1관을 가득 채우는 설치물이 버크적 숭고를 환기한다면, 관객을 날카롭게 찔러대는 감각의 폭탄은 칸트적 숭고를 일깨운다. 


6. 하지만 <노드 5.5>에서 결정적인 것은 두 번째 칸트적 의미의 숭고다. “칸트에게 현상계 밖에 비록 언표될 수는 없으나 물 자체가 존재해야 했듯이, 시뮬라크르의 저편(dehors)에는 언표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존재한다. 그곳은 숭고의 영역이다.”(진중권) 그것은 작품이 포격하는 감각과 관계가 깊다. 복합 1관을 거대한 블랙박스로 생각하고, 그곳에 (외로운) 인간 주체가 홀로이 서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거기서 인간은 압도적인 감각들에 움찔대며 포로처럼 사로잡힌다. 여기서 사유는 불가능하며, 그곳을 나온 뒤에나 가능하다. 이러한 면모는 오늘날 기술적 리터러시와 극명하게 드러낸다. 오늘날 기술은 인간에 편리를 제공하나, 언제나 논리를 감추어 둔다. 근대 이전 같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며, 개인이 학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블랙박스처럼 ‘너머’에 존재한다.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편리를 광고하며, 사용만을 권유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생각하기 전에 사용한다. 사유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기도 전에 사용한다. 생각하는 것은 체계적으로 하나씩 차단된다. 남는 것은 신경을 휘감는 감각의 덩어리밖에 없다. 생각은 블랙박스를 빠져나온 뒤에나 가능하다. 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심장을 박동하는 소리와 눈을 자극하는 선들이 수놓은 공간은 일렉장르가 휩쓸던 무렵의 클럽과 비슷했다. 


7. 매체예술을 기술이 문화에 침투하는 (혹은 문화가 기술에 반응하는) 한 가지 징후로 본다면, <노드 5.5>는 기술이 선도하는 감각적 퇴행을 드러낸 것이리라. 그래서 기술을 통해서 작은 것을 지향하는 작가는, 내면을 탐색했던 작업은, 흘러간 과거라고 강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은 매체예술의 초반기처럼 이런저런 잠재력을 실험하던 시기는 적어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골란 레빈의 초반기 작업과 <노드 5.5>의 차이일 것이다.






※ ACC 창제작 센터 소속 <키네틱 미디어 랩>은 레이저, 조명, 로보틱스, 프로젝션 기술을 활용하여 키네틱 미디어아트 작품을 개발하는 곳이다. 디렉터 료이치 쿠로카와Ryoichi Kurokawa, 크리에이터 히로시 마토바Hiroshi Matoba, 반성훈 세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 료이치 쿠로카와 디렉터는 소리와 영상을 실험적인 형태로 결합하는 작업을 주도하며, 2010년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디지털 음악 및 사운드 아트 부문에서 골든 니카 상을 수상했다. 런던 테이트 모던 54회 베니스 비엔날레, 베를린 트랜스 미디알레, 상하이 e ARTS, 바르셀로나 MACBA 등, 굵직한 기관과 페스티벌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현재 베를린에 거주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료이치 쿠로카와 홈페이지 : http://www.ryoichikurokawa.com 


※ 프로그래머와 작가로 활동하는 히로시 마토바는 2007년 소프트웨어 시퀀서 <오버벅Overbug>을 트랜스미디알레와 주요 매체예술 페스티벌에 선보이며 활동을 시작했으며, 주요 작품으로 <Light Valve>와 <Denki Domino>가 있다. 


히로시 마토바 홈페이지 : http://dominofactory.net/bio.html


※ 재료공학을 공부한 반성훈 작가는 상호작용적 작업과 비정형 디스플레이 연구를 진행하며 작가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관객의 반등을 현장에서 수집하여 곧바로 작업에 반영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관객의 동작을 수집하는 <Virtual Mob>과 소리를 수집하는 <Sound Planet>이 대표적이다. 




글. 김상우 (앨리스온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