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미디어아트 전시

2008 미디어비엔날레 리포트_exhibition review

yoo8965 2008. 10. 15. 01:13


들뢰즈의 책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프랑스의 음악가 피에르 불레즈(Pierre Boulez)는 ‘전음렬주의’(total serialism)의 기법으로 유명하다. 전음렬주의란 쇤베르크를 위시한 20세기 초반의 현대 음악가들이 주로 사용하였던 음렬주의를 확장한 것이다. 음렬주의가 기존의 음계를 거부하고 음계를 확장하였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기보체계(악보)에 바탕을 둔데 반해, 전음렬주의는 음을 음표로 표현할 수 없는 영역으로 확장한다. 말하자면 전음렬주의는 단순한 확장이 아니라 ‘음’의 정체성을 뒤흔들만한 전환 혹은 혁명의 확장이었다.

‘전환과 확장’이라는 이번 비엔날레는 그 제목만으로도 큰 기대를 갖게 하였다. 벌써 5회째를 맞이하는 이번 전시회는 비엔날레 전시 자체의 확장과 전환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미디어 아트 일반에 대한 확장과 전환의 모색이라는 야심찬 기획처럼 느껴진다. 미디어 아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 분야가 흥미롭고 새로운 것으로 다가올지 몰라도, 미디어 아트에 어느 정도 익숙한 관객이나 전공자들에게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식으로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전환과 확장’이라는 슬로건은 마치 불레즈의 전음렬주의가 그러했던 것만큼이나 이번 전시가 미디어 아트 자체의 전환을 위한 확장을 모색한 것으로 기대하게 만든다.

이러한 포부는 전시 기획의 세부 주제에서도 잘 드러난다. ‘빛’, ‘소통’, ‘시간’이라는 전시별 세부주제는 분명 미디어 아트가 전통예술과 차별성을 드러낼 수 있는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미디어 아트는 인상파 화가들이 추구하였던 순간의 빛뿐만 아니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의 변화 자체를 표현할 수 있다. 슈미트의 ‘살아있는 파사드’는 빛을 활용하여 건물의 파사드를 변화시키며, 리즈는 자신이 직접 개발한 프로세싱 언어를 사용하여 빛을 담은 동적인 이미지를 표현한다. 관객들의 많은 주목을 받은 리 후이의 ‘환생’ 또한 매체가 뿜어내는 빛을 통해서 침대의 중의적인 이미지를 표현한다. 모리스와 사토의 ‘라이트 샤워II’ 역시 미디어 아트만이 줄 수 있는 체험을 제공하며, 달의 진동이나 지구상의 생명체가 내는 파동을 사운드와 레이저을 이용한 빛으로 표현한 채미현의 작품도 전통예술로부터는 경험하기 어려운 빛의 체험을 전달한다. 하지만 다카하시 고타의 비디오 설치작품은 가상과 진실의 구분에 관한 철학적인 물음을 제기하는 극히 스테레오타입적인 문제의식을 담는데 치중함으로써 빛 자체에 대한 매체적 구현과는 동떨어진 느낌을 준다. 한편 헤르빅 투르크의 ‘보이지 않는 것을 측정하기’나 ITRI 크리에이티비티 랩의 ‘기의 흐름’과 같은 작품은 형식적인 면이나 주제의 면에서 볼 때 ‘빛’이라는 소주제보다는 ‘소통’이라는 소주제를 담고 있어서 1층에 전시된 것이 의아하게 느껴진다.

‘빛’이라는 주제 못지않게 ‘소통’이라는 주제도 미디어 아트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적합한 주제이다. 물론 미디어 아트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이 소통을 전제로 한 것이긴 하지만, 소통과 관련한 미디어 아트의 미덕은 당연히 ‘인터랙티브한’ 소통 및 시각뿐만 아니라 소리와 촉각 등 공감각적인 감각의 소통이라는 데 있다. 벨-스미스의 ‘백악관 위의 새들’, 아나이사 프랑코의 ‘연결된 기억’, 야신 셉티의 ‘점프!’, 이준의 ‘한 병의 일기’, 마르쿠스 한센의 ‘타인의 감정을 느끼다. No.3’, 서효정의 ‘테이블 위의 백설공주’ 등의 작품은 미디어 아트가 지닌 이러한 소통의 미덕을 드러내는데 충실하였다. 반면 이자와-코타의 ‘레논, 손탁, 보이스’, 모니카 브라보의 ‘시간의 파편 : 현재_여기에_있다’, 바니 아비디의 ‘예정된’, 크리스토퍼 토마스 알렌의 ‘대화’ 등 많은 작품은 매체가 갖는 새로운 소통의 가능성보다는 ‘소통’이라는 문제를 철학적으로 담론화하는데 치중하고 있다. 이들 작품은 ‘소통’을 표현하기보다는 그것을 주제화함으로써 정작 미디어 아트의 미덕으로부터 벗어나 관념의 유희로 전락하고 있는 듯한 우려감을 준다.

이러한 우려는 3층의 주제인 ‘시간’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 시간 또한 분명 미디어 아트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미덕 중 하나이다. 전통예술은 시간의 흐름을 한 순간으로 응축시켜서 표현해야 하지만, 미디어 아트는 시간의 흐름을 마음껏 표현하고 변경할 수 있다. 물론 선형적인 크로노스적 시간을 드러낼 수도 있고, 크로노스적 시간을 파괴하고 ‘가상의’(virtual,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잠재적인’) 시간을 드러낼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을 다루는 전시된 작품들은 상당수가 싱글 혹은 멀티 비디오 채널을 활용하여 ‘시간’에 대한 철학적 반성을 강요하거나 서사의 재구성을 통해서 시간을 담론화시키는데만 치중한 듯하다. 작품을 일일이 거론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이다. 반면 정작 미디어를 통한 새로운 시간의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작품들은 거의 부재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서 이번 전시는 뚜렷한 특징을 나타냄을 알 수 있다. 미디어 아트의 미디어적 가능성에 치중한 작품의 계열군과 미디어를 활용하여 철학적 담론을 담아내려는 작품의 계열군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갈라짐은 미디어적 가능성에 치중한 작품, 즉 새로운 프로그램이나 미디어의 공학적 성과들을 활용한 작품들이 더 이상 새로운 작품들을 양산하는데 한계에 부딪치면서 그 돌파의 가능성을 철학적 담론이나 내러티브에서 찾으려고 하는 경향을 반영하는 듯하다. 문제는 철학적 담론이나 내러티브에서 미디어 아트의 한계를 돌파하려는 계열의 작품들은 대부분 싱글 혹은 멀티 비디오 채널과 같은 기존의 미디어를 활용하는데 주목한다. 이들 작품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작품들이 하나의 패러다임을 형성은 오히려 미디어 아트의 활성화를 크게 위축시킬 것이다. 미디어 아트의 가장 큰 미덕은 기술과 예술을 어떻게 녹여내는가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번 전시에서 최악의 불명예는 당연히 소머러와 미뇨노에게 주어져야 한다. 이들의 작품은 이전의 A-Volve와 같은 작품에 비해서 기술적으로도 크게 후퇴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반비례하여 작품명 ‘생명을 쓰는 타자기’에서도 나타나듯이 담론적이고 철학적인 성격이 강해졌다. 물론 하나의 작품이 전시의 모든 것을 대변할 수는 없지만, 소머러와 미뇨노의 작품에서 새로운 전환과 확장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게되는 것은 상당히 역설적이다. 마찬가지로 ‘전환과 확장’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이번 전시는 아이러니하게도 미디어 아트 자체가 전환과 확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서 지극히 성공적으로(?) 다가오는 전시처럼 느껴진다.

글. 박영욱

박영욱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칸트 철학에서의 선험적 연역의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원래 사회철학에 대한 관심에서 철학을 공부하였으며, 학위 취득 후 사회철학적 관심의 지평을 문화와 예술의 영역으로도 확대하였다. 대중음악과 예술사, 특히 매체예술 분야에서 폭넓게 공부를 하였으며, 지금은 건축 디자인의 방면에서 그 사회철학적 의미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 고려대학교 철학과,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철학으로 대중문화 읽기」, 「고정관념을 깨는 8가지 질문」등 다수가 있으며, 논문으로는 『이미지의 정치학-리오타르의 ‘형상’과 ‘담론’의 이분법』, 『시각 중심적 건축의 한계와 공간의 불투명성』 등을 비롯하여 매체 및 매체예술에 관한 여러 논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