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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휴먼 시대의 미술 : 신체변형 미술과 바이오아트_book review


지털 생명 기술시대에 인간은 무엇일까.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들은 항상 데카르트의 코기토에서 시작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기술에 의해 침범당한 인간은 이제 정신과 신체의 이분법적 이해로는 쉽게 정의 내려지지 않는다. 신체변형과 증강 등의 기술이 인간의 본질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기술 시대의 인간은 무엇을 생각하는가?" 이것이 저자가 이 책의 서론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다. 도처에 가상실재와 고도기술 융합기계가 혼재한 현실에서, 우리는 이미 ‘포스트휴먼(Post-Human)’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포스트휴먼이란 포스트(Post)와 인간(Human)의 합성어이다. ‘탈’을 의미하는 ‘포스트’ 때문에 탈-인간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실로는 우리가 인간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조금씩 달라진다. 저자는 포스트휴먼 개념을 크게 두 가지로 정의하는데, 하나는 기술발전에 따라 기본적인 능력이 이제까지의 인간을 넘어서 향상되고 변화된 존재, 다른 하나는 인간중심주의를 근간으로 한 근대적 의미의 휴머니즘을 극복한 존재이다.


  여기서 초점은 새로운 인간종의 탄생이 아니다. 포스트휴먼은 넓게는 디지털 기술과 바이오기술에 의해 변화된 환경 속에서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게 된 인간까지 지칭한다. 최근의 담론들은 변화된 인간의 상태가 다양한 문화 속에서 어떻게 재현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SF 영화에서나 접한 약물에 의해 강화된 신체를 상기하며 인간적 정체성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시달린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우리는 이미, 인공관절이나 임플란트로 문제가 생긴 부위를 인공장기로 바꾸고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는 포스트휴먼 개념과 그것이 미술에서 등장하는 형태, 그리고 현대 생물학의 개입과 함께 등장한 바이오아트를 순차적으로 다루고 있다. 1부에서 저자는 위에서 설명한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포스트휴머니즘’ 개념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포스트휴머니즘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발달과 함께 언급되기 시작한 개념으로 휴머니즘의 위기와 함께 도래했다. 17-18세기를 거쳐 근대 과학의 합리적 정신과 만난 휴머니즘은 데카르트, 계몽주의와 20세기 반-휴머니즘, 포스트구조주의에 의해 위기를 겪었다. 이에 대해 이집트 학자 이합 핫산(Ihab Hassan)은 인간의 형태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휴머니즘은 종말로 가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의 종말이나 돌연변이화를 상징하는 단어가 아니다. 이는 인간 정체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리고 포스트휴먼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물고 동식물, 로봇, 유전자 이식 생명체를 포함하는 새로운 생태계를 수용하는 것이다. 


  2부에서는 포스트휴먼 신체가 매체로 활용되기 시작한 그 변화지점을 다룬다. 미술에서 활용되는 신체는 그 자체로 근본적 매개체 역할을 수행한다. 가장 변화무쌍하고 전복되기 쉬워 양면적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가상현실을 통해 탈신체화까지 경험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역할이 무한으로 확장된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그 역사를 되짚는다. 20세기에 들어 기계와의 결합을 통해 확장된 신체는 뉴미디어와 기술의 가능성에 근거한 ‘기술적 현상학’의 논의 아래 놓였다. 메를로 퐁티 현상학의 재조명과 함께 신체는 모니터되고 수정되는 구조로 변했다. 21세기에는 디지털 혁명과 유전공학이 신체에 대해 실제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인 수정을 가속화했다. 이에 따라 최근의 미술가들은 연구자이자 학자, 미술가적 태도를 가지게 되었고, DNA와 혈액 등 생물학적 요소를 직접 매체로 활용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해부학의 발달 이후 우리의 신체는 MRI나 CT 기술을 통해 디지털 정보화된다. 시각적으로 불투명하고 폐쇄되었던 신체는 시각기술을 통해 이미지로 제공되었고 이는 미술가들의 도전의식을 자극했다. 미술가들은 의사나 과학자의 방법으로 신체를 관찰하고, 체내 및 체외 실험과정을 다루고자 한다. ‘생명 그 자체’를 조작하는 작업들은 실제 세포를 조작하고 그 과정을 기록한다. 이들은 작품을 통해 자아와 신체의 관계, 실험자들의 판단과 윤리적 결정을 보여주려 했다. 폴 페리(Paul Perry)는 의학의 도움을 받아 세포와 신체조직을 실험한다. 그는 자신의 백혈구와 쥐의 암세포를 혼성시켜 죽지 않는 세포인 혼성세포(hybridoma)를 창조하고 <선과 악(Good and Evil on the Long Voyage)> (1997)이라 이름 붙인다. 이는 종양성 잡종세포로, 암치료에 사용된다면 선하지만 돌연변이 탄생에 대한 두려움을 주기 때문에 악하기도 한 것이다. 작가는 작품에 대해 “나는 ‘발생적 경계’, 즉 종(種)을 구별하는 장벽을 재정의하고 설명하고자 프로젝트를 시작했다.”라고 밝혔다. 이렇듯 실험실 속에 들어온 미술가들은 미술과 생물학적 기술 사이에 경계를 두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유전자까지 조작 가능해진 신체는 최근의 미술에서 가능성을 더욱 활짝 열어놓았다. 특히 신체가 기계 장치를 받아들이면서 신체와 기술이 접촉하는 경계에서 미묘한 변증법적 상황들이 발생한다. 살/기계, 내부/외부, 주체/객체, 인간/포스트휴먼 등과 같은 대립 요소들은 서로를 매개하며 변형된다. 이에 따라 포스트휴먼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신체는 점점 사이보그화 되어간다. 저자는 이렇게 기술과 밀접해진 보철적 신체들을 ‘하이퍼매개된 신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미술 속에서도 포스트휴먼적 경계에 있는 존재들은 등장한다.


 

폴 페리, <선과 악>, 1997


  스텔락(Stelarc)은 사이보그적 정체성을 탐구하는 작가다. 그는 기계와 신체의 관계를 실험하면서 자신의 신체에 전자회로를 연결해 연장 및 수정하는 방식으로 기술과 신체를 통합한다. 그에게 신체는 진부하다. 신체는 모니터되고 수정되며 단순히 기계가 삽입되는 장소가 아니라 재구성, 재생성, 복제를 위한 장소로 기능한다. 대표작인 <Internet Upload>(1995) 프로젝트는 작가 자신의 몸의 움직임을 인터넷상의 원격 센서와 전자적으로 연결시킨 작업이다. 그의 몸은 주체의 힘에 의해서가 아닌, 인터넷 속의 집단적 활동에 의해서 활성화된다. 그의 신체는 해체와 사라짐을 겪지 않고 오히려 주체로서 확고히 기능한다. 그의 작업은 기계와 신체 사이의 흐려진 경계를 보여주기 위해 시도되는 동시에 신체에 의존해 수행된다는 점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도래한 기술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사유하도록 촉구한다. 


스텔락, <Internet Upload>, 1995


  3부에서 저자는 생명공학 기술을 이용하는 ‘바이오아트(Bioart)’를 소개한다. 바이오아트는 생명을 뜻하는 바이오(Bio)와 아트의 결합어로 ‘생명 그 자체로서의 미술’을 뜻한다. 바이오아티스트들은 과학자처럼 살아있는 유기물을 이용해 작업한다. 이는 생명공학의 발전에 영향을 받은 작가들에 의해 시작되어, 21세기 완성된 휴먼게놈 프로젝트를 기점으로 발전했다. 휴먼게놈 프로젝트를 통해 유전자는 정보로 환원되어 자료로 이용 가능해졌다. 바이오아티스트들은 생명공학 기술을 긍정하기도, 때로는 비판하기도 하며 생명을 매체로 사용해 관람자들에게 살아 있는 상태와 그 과정을 전달한다. 그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문들은 다음과 같다. 이것이 정말 미술인가? 그들은 미술가인가 과학자인가? 그들의 질문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전위적으로 다가온다.


  저자는 바이오아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하나는 생명기술에 관한 주제를 회화, 사진, 비디오 등의 방식으로 다루는 ‘바이오토픽 바이오아트’, 다른 하나는 유전공학과 조직공학 기술을 이용해 살아있는 세포와 조직, DNA로 생물학적 실험을 진행하고 작품으로 제시하는 ‘바이오미디어 바이오아트’이다. 후자는 ‘바이오미디어’가 지닌 특별한 의미를 강조하기 때문에 윤리적 문제들을 야기한다. 그렇다면 바이오미디어는 무엇일까. 바이오미디어는 다양한 미디어의 층위에서도 전례가 없었기에 학자들마다 그 정의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 저자는 이에 대해 포스트미디어의 조건 아래 모든 미디어가 영향을 주고받고 혼합되는 차원에서 설명될 수 있다고 보았다. 바이오미디어는 디지털 기술과 생물학의 만남 속에서 생물학적 매체의 의미가 변화하며 생겨난 최첨단의 미디어이다. 바이오미디어 아래 기술은 이제 생물학을 새로운 문맥에서 작용하도록 만들며 재조건화되고, 미학적, 도덕적 문제들을 불러일으킨다.


  20세기에 들어 순수미술 영역을 위협하는 확장된 미술 매체들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유전자 이식 기술이나 조직공학기술을 이용해 살아있는 생명체를 매체로 다루는 미술은 전례가 없었다. 매체의 측면에서 볼 때 확장을 넘어 새로운 분야의 도입이기 때문이다. 바이오아티스트들은 생물학 실험실에서나 활용되는 젖은 매체를 사용한다. 그리고 실험을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컴퓨터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다. 유진 태커(Eugene Thacker)는 바이오아트를 생물학적 구성물과 과정에 대한 정보의 재문맥화로 정의했다. 분자생물학의 젖은 실험실은 컴퓨터의 마른 실험실에 의해 증강 매개된다. 바이오미디어가 새로운 것은 기술을 통해 생물학적 영역을 새로운 문맥에서 작용토록 만들기 때문이다. 


  바이오아트는 미디어의 ‘살아있음’을 강조한다. 바이오미디어를 미술 개념의 확장으로 받아들인다면, 살아있음에 따라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는 실존적 의미와 삶, 죽음의 문제에 대한 인문학적 논의들도 함께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유전자 시대의 풍경을 디스토피아적으로 서술한 작가들이 있다. 이전부터 20세기 SF문학이나 사이버펑크 영화에서도 이는 대체적으로 디스토피아로 상정되곤 하였다. 호주 작가 파트리샤 피치니니(Patricia Piccinini)는 조각이나 사진으로 생명기술에 의해 인공적으로 창조된 돌연변이 생명체들을 구현해내는 바이오토픽 바이오아트 작가이다. 그녀의 작품은 극사실주의로 사실과 허구를 공존시키며 우리에게 선택과 책임이라는 윤리적 문제를 환기시킨다. 그녀는 ‘신체가 기술에 의해 폐지되거나 재구성되는것의 의미, 그를 둘러싸고 발생하는 선택이나 책임, 윤리적 문제들’을 논쟁적으로 표면화한다. 


파트리샤 피치니니, <신생아>, 2010


  이에 반해 작가 에두아르도 카츠(Eduardo Kac)는 바이오아트를 유전공학 기술과만 연관 짓지 말고 광범위한 사회적, 환경적 문맥에서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형광 토끼를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한 브라질 출신 화가 카츠는 로봇을 통해 생명체 간의 소통 가능성을 탐색하거나 살아 있는 생명체를 주제 및 재료로 삼는다. 카츠의 작업에서 실행적 키워드는 네 가지로 요약된다. ‘혼성화’와 ‘언어적 소통방식’, ‘신체 및 신체의 현존성’, 그리고 ‘복잡성’이다. 그의 작업은 물리적 공간과 가상공간을 공존시키고, 인간과 동식물, 기계 사이의 새로운 이해관계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카츠의 특징은 유전자 공학 및 생물학을 미술로 끌어들여 조합하는 작업 방식에 있으며, 이에 따라 바이오미디어적 성격을 띤다. 그는 바이오 물질을 불활성상태로 제시하거나 살아있는 유기체를 만들고 변형한 형태로 작업한다. 종의 기관 중 일부를 바꾸거나 새로운 형태의 생명체를 창조해내는 것은 그의 작업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특징 중 하나이다. 


  카츠의 <GFP 버니(GFP Bunny)>(2000)는 유전자 이식 토끼이다. UV 불빛아래 형광으로 빛나는 토끼 ‘알바’는 인간의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범주의 생물이다. 해파리에서 추출한 형광 유전자를 알비노 토끼 DNA에 이식하여 탄생시킨 것이다. 알바는 결국 대중의 반발로 전시에 오르지 못하고 작가의 집으로 입양되었고, 작가는 이를 통해 분자생물학자들의 연구가 사회적 충격을 가진 행위라는 것이 간과되고 있으며, 생명공학과 같은 기술은 이미 발전되어 우리 사회에 들어와 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전시에서 알바를 선보일 수 없도록 거부한 것은 실험실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들을 포장하고, 논의를 지연시키는 행위이다.”라고 설명했다. 과학 기술을 통해 발전된 새로운 존재의 개념을 도출하고, 역사적인 개념에서만 이해되던 존재를 다시금 고찰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카츠 작품의 주된 논점은 실존하는 대상이 작품이라는 것, 즉 생명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에두아르도 카츠, <GFP 버니>, 2000


  바이오아티스트들은 익명의 과학자들이 스스로 언급할 통로가 없어 은폐되고 마는 사회, 윤리적 문제들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여기서 미술가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분자적 시선이며 이들은 하나같이 생명체의 복제 및 재생산에 대한 윤리적 입장을 표명할 것을 촉구한다. 바이오아티스트들은 다가올 미래를 예측하면서 생명과학 기술의 양면을 폭로한다. 그들은 질병 없는 세상을 위한 희망적 유토피아인 동시에 동물의 희생이 만연하기도 한 실험실 내부의 영역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논란거리로 만들기도 하면서 누구보다 강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는 역할을 수행한다. 저자는 포스트휴먼 시대를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기술의 이면을 들춰내는 작업들을 끊임없이 살피고 관찰하는 태도를 요구하고 있었다.



저자소개

전혜숙

저자 전혜숙은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후, 미술사학과 대학원에서 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인문과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며 현대미술사학회 회장을 역 임한 후 이 학회에서 발행하는 『현대미술사 연구』의 편집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개념미술, 포스트모던, 뉴미디어 아트에 관심을 갖고 연구해왔으며 최근 몇 년간 포스트휴먼 신체와 바이오아트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최근의 연구로는 저서 『20세기 말의 미술, 일상의 공간과 미디어의 재구성』(2013), 논문 「미술 속의 포스트휴먼 신체와 의학」, 「현대미술 속의 신체변형: 포스트휴먼적 ‘경계존재’의 실행 방식들」, 「에두아르도 카츠(Eduardo Kac)의 ‘새로운 생태’에 관한 연구」,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경계-바이오아트와 생명개입」, 「피부, 경계가 무너지는 장소」 등이 있다.


목차

여는 글: 현대미술과 포스트휴머니즘  
1부 포스트휴먼과 포스트휴머니즘  
 1 포스트휴먼 
  1 포스트 + 휴먼 
  2 기술시대의 인간  
  3 포스트휴먼 신체  
  4 포스트휴먼의 조건  
 2 포스트휴머니즘 
  1 휴머니즘의 위기 
  2 포스트휴머니즘의 도래 
  3 포스트휴머니즘과 트랜스휴머니즘 
2부 미술 속의 포스트휴먼 신체 
 1 20세기 후반의 신체담론과 신체미술 
 2 인체에 대한 새로운 미술도상

  1 디지털 정보화된 신체
  2 신체를 바라보는 의학적 시선 
  3 Art in vivo, Art in vitro 

  4 프로스테시스와 신체의 경계 
 3 신체변형 미술 
  1 신체변형 미술의 배경과 역사 
  2 미술 속의 포스트휴먼적 경계존재들 
   1) 자기혼성을 위한 성형퍼포먼스: 오를랑 
   2) 이질성의 결합: 바티 커 
   3) 신체의 연금술사: 매튜 바니
   4) 어린이 동산의 돌연변이들: 오다니 모토히코의 〈롬퍼스〉 
   5) 윤회를 반영한 혼성적 존재들: 대니얼 리 
   6) 아르 오리엔테 오브제 
 4 기계와 융합된 미술가의 신체 
  1 살과 금속의 만남과 공생 
  2 연장된 신체, 〈제3의 손〉 
  3 기계를 대행하는 신체 

3부 생명공학과 바이오아트 
 1 바이오아트란
  1 생명공학기술과 휴먼 게놈 프로젝트
  2 바이오아트의 의미와 종류
  3 바이오아트의 선례들 

 2 살아 있는 미술 매체 
  1 바이오미디어 
   1) 미술 미디어의 계보 
   2) 포스트미디어로서의 바이오미디어 
  2 젖은 기술과 젖은 매체
   1) 생물학의 매체 
   2) 생물학과 디지털 기술의 만남  
  3 생명의 수수께끼 언어: AGCT
   1) 조 데이비스의 〈마이크로비너스〉와 〈은하수 DNA〉 
   2) 에두아르도 카츠의 〈창세기〉
  4 미디어의 ‘살아 있음’과 ‘죽음’ 
 3 유전자 시대의 풍경 그리기 
  1 유토피아의 경계: 현실이 반영된 과학적 상상력 
  2 문학과 영화의 유전공학 내러티브 
  3 인공적으로 창조된 돌연변이 생명체 
  4 DNA 그리기와 DNA 초상화 
 4 미학적 수단이 된 유전자 조작 
  1 혼성된 꽃들과 엽록소 캔버스 
   1) 느린 방식의 유전자 조작  
   2) 엽록소 캔버스 
  2 에두아르도 카츠의 유전자 이식 미술 
   1) 식물, 동물, 인간, 그리고 기계 사이의 융합과 소통 
   2) 유전자 이식 미술 
   3) ‘새로운 생태’를 향하여 
 5 사회를 읽는 분자적 시선 
  1 DNA, 부정할 수 없는 운명의 청사진? 
   1) 〈속도비교 측정 장치〉 
   2) 〈잠재적 수치 의정서〉 
  2 천 그루가 된 한 그루의 나무 
   1) 나탈리 제레미젠코 
   2) 에이미 영스 
 6 바이오아트와 생명개입 
  1 살게 만들거나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 
  2 ‘돌봄’의 미학에 내재한 생명 개입의 아이러니 
  3 동물 희생이 없는 유토피아는 가능한가? 



글  문현정 (앨리스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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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soulco.tistory.com BlogIcon 지성의 전당 2019.03.17 21: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데카르트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겼습니다.
    제가 또 댓글을 달았다면 죄송합니다.
    인문학 책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책 내용 중 일부를 아래 글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정보를 드리는 것뿐이니
    이 글이 불편하시다면 지우거나 무시하셔도 됩니다.
    ---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https://blog.naver.com/ecenter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