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Aliceview

낯선 리듬과 만나다, <고갈> _aliceview

비회원 2009. 3. 1. 12:06



지난 20-22일 한국영상자료원이 운영하는 상암 시네마테크KOFA에서 '영화창작집단 곡사'의 상영전이 있었습니다. 시네마테크는 "한국고전영화를 중심으로 예술영화, 독립영화, 애니메이션, 다시 주목받아야 할 최근영화 등 다양하고 접하기 힘든 국내외 영화들을 상영"(시네마테크 홈페이지에서)하고 아카이브 사업도 꾸준히 진행하여, 특히 잊혀졌던 우리나라의 과거 영화들을 재발견하고 영화사를 구축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하네요. 자료를 사용하는 데는 돈이 들지만, 영화 관람은 무료. 제가 본 작품은 21일 16:30의 <고갈>입니다.

상영한 장소와 영화, 감독 모두 처음이었죠. '곡사'라는 게 사실 김곡-김선 형제가 주멤버라는 것, 그리고 <이 사람을 보라>, <시간의식>, <정당정치의 원리>, <뇌절개술>, <자가당착> 등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좀 분열적이고 철학적이겠다 신기할지도…라는 사전정보 정도만 갖고 있었어요. 저는 까락스-라방 페어처럼 이마에 '68' 세례를 받은 펑크적인 작업들을 일단 좋아하는 반면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 같은 연극무대를 옮긴 듯한 작품도 사랑하거든요. 뭐든 호기심이 생기면 보게 되죠. 그런데 상영 시간이 되어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옆에 있던 분에게 모 영화제에서 틀었다가 관객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는 전과를 듣게 됩니다. 128분이라는 상영시간을 그제야 확인하고 조금 걱정이 들기 시작했지만, 그냥 이미지만을 즐기자고 마음먹었죠.

(이 리뷰는 스포일러가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씀드리기 애매하네요. 영화 자체가 잘 짜여진 서사보다는 다른 문법에 의존해 표현된 부분이 많고, 저 역시 이론적인 분석이나 일관된 묘사보다는 당시 제가 보며 느꼈던 감상을 복원하고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답하는 식으로 쓸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비유로 천국을 말했다지만, 나는 현실로 비유를 말한다. 그 비유가 천국은 아닐 것이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며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희망을 믿지않을 때 현실은 지옥일까요. 지금은 득도의 경지에 오르신 것 같은 김기덕에게 <나쁜 남자>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팔아 밥벌이를 해야한다는 참으로 고단한 피날레가 인상적이었는데, <고갈>에선 그 정도 설정은 도입부에 불과합니다. 김기덕스럽다는 끔찍함 정도는 애교로 보일 정도로 이미지나 소리에 의한 충격요법도 강렬하고요. 8mm라는 빈약한 장비로 찍은 왜소한 인간들의 핀트가 어긋난 모습을 보여주는데 애정도 조소도 없이 담담할 뿐입니다. 점점 낯설고 불편해지는 심정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몇몇 이미지들은 상징성을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거기에 기이한 작중인물들의 행동들은, 전혀 어색하지 않은 명연기를 통해, 관객들에게 지금 보고 있는 이 영상이 분명 보이는데 이해는 못하겠다는 피로감을 머릿속에 직접 호소합니다. 마지막으로 신경을 긁어주는 영상과 음향은 몰입보다는 단절감을 선물합니다. 그걸 한아름 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에게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도 한 두어 명 나가더군요.

저 역시 내맘대로식 개그 코드가 없었다면 그 사람들을 따라나섰을지도 모르겠군요. 뭐랄까, 양가위 같은 느와르가 타락하고 타락하게 되면 저런 감수성으로 읽힐 수 있겠다고, 패러디로 보고 웃으려 했거든요. 상궤를 벗어난 작중인물들의 말과 행동에서 보이는 진지함이 자아도취로 보이기도 했으니까요. 억지스럽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깊이 공감하기에는 영화 자체가 너무 애매한 위치에 있었죠. 사실 웃는게 웃는게 아니죠. 저에게 있어서도 <고갈>은 날고기를 보는 느낌이었거든요. 또 그게 어디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내 머리 속의 날고기입니다. 물론 이미지를 그저 즐기자는 마음은 그때까지도 유효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예전 그 말을 처음 들었던, 모 철학자의 사진전에서도 고기무더기 찍은 사진이 참 많았다는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수퍼 8mm필름으로 촬영된 영상은 푸르고 거친 입자가 그대로 살아있"(상영관에 비치된 안내지에서)다고 합니다. 인화작업을 거쳐 HD로 변환한 영상에는 필름의 잡티들이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줌인-아웃의 범위가 작은듯, 넓은 풍경을 담아내기에는 벅차 보이고 접사의 경우에는 저해상도 픽셀이 그대로 노출됩니다. 또 새만금과 인천의 공단들 일대에서 게릴라 방식으로, 조명도 없이 촬영된 영상은 딱히 서사적인 이유로 의도된 것 같지도 않은 어수선한 조도를 보입니다. 이것만해도 심리적으로 불안함을 조성할텐데, 음향까지 도와주는군요. (음악을 맡은 홍철기의 작업은 이곳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혹시 페트병에 모래를 넣은 퍼커션을 만들어본 적 있나요. 그걸 좀 부피를 키우고 자극에 민감하게 움직이도록 한다면 비슷할지도. 코발트빛 화면과 모래와 같은 소리들 사이로, 빨간 욕망들은 그래서 로모사진처럼 매력적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나중에 영화를 보시게 된다면 '빨간잠바 철가방의 사랑'이나 '트름 드럼비트' 부분에는 웃을 수 있을 거에요.

그럼에도 이 영화는 현실적이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현실은 누군가의 머릿속에서만 실감될 현실입니다. 웰메이드영화처럼 스크린에 걸어놓은 채 세련된 플롯을 통해 다가가는 '감상'을 하기에는, 메시지가 없는 즉각적인 행위들로 내 머릿속에 침투합니다. 그러면서 이것은 현실이 아닌 영화일 뿐이라는 걸 - 어쩌면 영화라는 단어 보다는 '필름'으로 인식해주길 원하는 인상 - 끊임없이 의식하게 하는 효과를 주는 장치들이 많은데, 그 중 하나가 남발로 느낄 정도로 자주 쓰이는 암전입니다. 그런 면으로는 연극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또한 예전에 별 중요하지 않게 지나친 사람과 장소가 다시 등장하는 경우도 많거든요, 그 역시 하이퍼매개적인 흐름(브레히트나 베케트 혹은 아르토)에 가깝겠지요. 영화 자체를 놔두고 다른 장르의 예술을 연상시키는 게 기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이들이 영향 받았고 표현하고 싶은 것이 여러 부분에 걸쳐 연결되어 있다는 걸 확인할 수는 있었죠. 저는 <고갈>만을 보았습니다만, 다른 작품들에는 또 다른 수법들을 쓰는 것 같군요.
(뮤직비디오 같다는 <Digression/Digression>, 마네킹을 주연삼아 찍은 <자가당착> 이라던가.)

<고갈>은 제목 그대로 그 상태를 폭로하기만 할 뿐, 약속은 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의 고갈, 가이아적인 자연환경의 고갈,  권력의 고갈, 사랑의 고갈, 욕망의 고갈 등등 가능성을 보여줄 뿐이에요. 여러 층위로 보기에도 이 작품은 거칠긴 해도 이미지의 상징성과 인물들 간 역학구도가 잘 표현되어 있어 분석하자면 꽤 재미있을듯. 하지만 저는 분위기에 취하는 정도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이미 모래처럼 기호화된 것을 다시 체로 고르는 건 정말 촘촘한 체가 필요하니까요. 그런 면에서 보자면 '뻘'이라는 (더러울 것 같은데 몸에 좋다는) 끈적임으로 표현되는 이 영화는 제대로 들리는 대사가 별로 없는데, "나는 기억안나는데, 엄마가 날 낳았단다, 넌 어디서 태어났냐?" 라는 남자가 여자에게 건네는 한 마디에서 느낄 수 있듯, 데카당한 포스가 있어 다행입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나 효과가 있는 것이겠지만, 후반부에 조명없이 감행된 야간촬영 부분에서, 완전히 뭉개져서 뿌연 형체만 보이는 피사체들의 동작은 음악처럼 흐른다고 느껴질 정도였어요. 그리고 모래처럼 깔려있던 소리가 영화 말미에 꺼지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때의 이명으로 영상의 마지막 몇 초가 흘러들어오는 느낌도 있었죠. 알게 모르게 지속적으로 들려오던 소리 자극이 갑자기 사라지니 귀가 게걸스러워지는 듯.

레오 까락스가 영원한 틴에이저라면 <곡사>는 유아, 혹은 나이가 없는 걸로 보입니다. 김기덕의 도의 세계로 갔다면 이들은 동물-기계의 세계로 갔어요. 인간이 아닌 다른 가능성을 가진 상태로 동물-기계를 좀 더 긍정적인 상태로 보고 싶다고 할까요. 동물-기계 사이에도 차이는 있겠죠. 그들은 기계적인 도구를 이용하여 동물적인 감성을 표현하는 것에 가까워 보입니다. (저는 기계적인 감성으로 동물적인 도구를 더 좋아합니다만 - 사육보단 사용당하는 게 더 편하고, 조련의 고통보다는 학습하는 지루함이 더 낫고, 동물은 더럽혀지지만 기계는 윤이 날 것만 같기에.) 그래서 좀 더 매끈한, 말라붙은 뻘 같은 디자인으로 욕망을 보여줄 수 없는지 묻고 싶었어요.  


영화정보(상영관에 비치된 안내지에서)

<고갈>
김곡, 2008, Fiction, Color , HD, 128mm

연출 : 김곡
제작 : 김곡 김선
각본 : 김곡
촬영 : 권상준
편집 : 김곡 김선
음향 : 홍철기
출연 : 장리우, 박지환, 오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