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미디어아트 전시

테크놀로지와 아트가 만난 풍경_Multiscape-영상미디어전_exhibition review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3. 19. 11:20


“기술은 모든 예술활동의 근간이 되는 열쇠 가운데 하나이다. 기술은 우리의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장애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생기는 긴장감이야말로 모든 예술작품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빌 비올라(Bill Viola)

마산시는 올해부터 2013년까지 총사업비 7000억 원을 투입하여 구산해양관광단지 내에 한국형 로봇테마파크인 ‘마산 로봇랜드’를 조성할 계획이다. 앞으로 5년간 99만 1700㎡ 규모의 부지에 로봇킹덤, 에코로봇 파크, 로봇아일랜드 등 3개 구역, 28개의 공, 수익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다. 오늘날 여러 가지 신기술이 범람하고, 심지어 사람의 몸에까지 인공장기가 파고드는 현실을 직시해 본다면 곧이어 영화에나 등장하던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과 함께 거리를 활보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이에 마산 3.15 아트센터에서는 로봇랜드 유치 기념 특별기획전으로 <MultiScape>展을 개최하였다.

3.15 아트센터 전경 모습
ⓒ 3.15아트센터 All rights reserved.

과학과 예술이 손을 잡은 것은 어제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르네상스 시대 브루넬레스키는 원근법을 개발하여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에 직경 45m에 달하는 거대한 돔을 무사히 올렸고, 그의 제자 마사초는 그것을 2차원적 회화에 응용하기 시작하여 레오나르도 다빈치, 파울로 우첼로와 같은 과학자 겸 예술가의 작품에서 완벽히 구현된다. 또한 인상파 화가들은 카메라의 발명에 힘입어 마치 뷰파인더를 통해 바라본 장면처럼 순간적으로 한쪽 화면이 잘려나간 상황적 구도와 프레임을 선보였고, 미래주의자들 역시 20세기의 진보한 현대과학의 이미지를 가감 없이 작품의 모티프로 삼았다. 사진과 비디오, 컴퓨터를 바탕으로 한 여러 최첨단 테크놀로지는 이제 시각예술의 판도를 장악하고 있다. 이처럼 오래전부터 상상력을 자극하는 복잡하고 새로운 표현수단이나 노하우에 의지해왔던 예술가들에게 과학기술은 그들의 생각을 옮겨 담는데 그 어떤 도구보다도 유용하고 매력적인 매체가 되어왔다.

이번 전시는 특별히 로봇랜드 유치를 기념하는 기획전이므로 필자는 내심 최첨단의 새로운 기술적 매체를 이용한 작품들을 볼 수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전시제목이 Multimedia가 아닌 MultiScape(다각적인 풍경)이다. Multi는 다양성의 의미와 함께 미디어아트의 무제한 생산 가능한 특성을 내포하고 있는데, 여기에 그것의 적자인 풍경(화)이 만났단 점이 조금 이색적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각 전시장의 부제는 Reading, Writing, Memorizing으로 그 강한 문자적 특성 때문에 시대를 거스르는 듯한 고전적 느낌마저 안겨준다. 맥루한은 인류의 역사를 크게 구술문화 시대와 문자문화시대 그리고 전자문명시대로 나누었다. 이러한 부제는 일견 인터넷을 통해 초를 다투어 쏟아져 나오는 각종 이미지와 영상물들이 일회적으로 소비되는 전자문명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순간적이고 감각적인 직시보다는 지속적이고 논리적인 사유를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전시는 미디어 아트를 가능케 했던 비디오와 사진을 주요 매체로 다룬 작품들이 주를 이루며, 19명의 작가들이 제각기 카메라를 통해 바라본 현실과 상상적 공간을 자신만의 다양한 시각으로 스케치한 풍경들을 소개한다. 그럼 기획의도대로 전시장을 찬찬히 살펴보자. 3.15 아트센터 전시실은 세 개의 공간으로 나눠진다. 전시공간에 따라 <읽기, 쓰기, 기억하기> <쓰기, 기억하기, 읽기> <기억하기, 읽기, 쓰기>라는 소주제로 나뉘어 전시가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카테고리는 작가가 작품을 잉태하는 과정에서 무수히 읽고, 쓰고, 기억하기의 연속적인 행위의 연결고리를 표현한 것이라 하는데, 기획자에 의하면 아르테 포베라의 대표적인 작가, 주제페 페노네의 1960년대 말의 작품 <Writes, Reads, Remembers>의 명제에서 개념적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이 세 가지가 반복되는 과정은 모든 작가의 창작활동 속에 자유자재로 유영한다. 마치 작가가 일상에서 글과 어떤 현상들을 보는 것, 소리를 듣는 것을 읽기로 명칭 한다면 그중 기억된 내용들은 읽은 내용을 마음으로 담아둔 것으로 쓰기를 통해 마치 실타래가 풀어지듯 예술창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먼저
<읽기, 쓰기, 기억하기> 공간은 주로 현실의 풍경을 읽어 재구성한 작품들로 구성되었는데, 전시실에 들어서면 오른편에 이민호의 초현실적인 사진작품이 시야를 고정시킨다. 도시 속에 조성된 인공적인 경관을 휴대용 전자카메라, 엠피쓰리와 같은 기기 안에 넣는다는 발상에서 시작된 작품이다. 휴대가방 속에 들어간 ‘휴대용 풍경’은 자연과 산업화의 조화를 이루고 있음에도 다소 이질적이고 생경하여 풍경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전시장 안쪽 벽에는 김지수의 인물영상화면 7점이 나란히 줄지어 있는데, 인물의 반을 가르는 경계선을 따라 이미지를 구성하고 있는 최소 단위의 색소가 바코드처럼 수평적으로 화면을 점령해가는 형식의 특이한 장면이 펼쳐진다. 결국 사람들의 형상은 화면을 가득 메우는 형형색색의 색 띠로 전환된다. 사실적인 형상이 색소에 의해서 일그러져가는 과정은 디지털 사진이 가진 기술적 속도감과 함께 구상과 추상의 오묘한 경계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그리고 확대된 증명사진들이 나열되어 있는 김세진의 작품을 보면 각각의 사진 아래에는 이름표처럼 그들을 지칭하는 글이 적혀있는데, 하나같이 사회적으로 금기시하는 닉네임들이라 주의를 끈다. 우리의 눈과 뇌는 그 이미지와 글을 동시에 인식하여 언뜻 매칭이 되지 않음에 이내 혼란함을 느낀다. 알고 보니 사진의 주인공들은 작가의 지인들이라 한다. 작가는 그들을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후 전혀 상관없는 이름표를 닮으로써 우리가 사회로부터 혹은 교육을 통해 습득해온 사회적 판단의 기준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그런 기준으로부터 생겨난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각자의 실체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우리모습을 지각하게끔 한다.

이민호_Portable Landscape II n.11_digital c-print_106x150_2008
ⓒ 3.15아트센터 All rights reserved.

김지수_틈새빛살 얼굴A_digital print_Diasec_30x45_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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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진_Night Watch_3채널비디오_3분20초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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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쓰기, 기억하기, 읽기> 공간에서는 풍경의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진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독자적인 예술 장르로 위상을 공고히 다지고 있는 사진은 19세기에 처음 발명되었을 때 이제 회화는 죽었다라고 할 만큼 현실재현능력에 있어 가장 정확하고 실제적인 도구로 인식되었으나 요즘은 디지털 사진기술로 인해 합성과 복제, 변형이 가능해져 ‘지금 여기’라는 현장감과 다큐멘터리적 성격이 무색해질 만큼 그 본질은 모호해지고, 무한한 상상과 환각의 세계를 가공해내고 있다. 장 가브리엘 로페즈의 작품은 그러한 사진의 허구성을 잘 보여준다. 보기에는 똑같은 사람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각각 다른 시간의 다른 사람들이다. 단지 비슷하지만 다른 상황으로 인해 만들어진 하나의 인물인 것이다. 보여지는 것과 실제의 괴리, 완벽한 하나의 완성체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난다주도양의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사진이 가진 무한 복제적 특성을 이용해 난다는 실제 배경에 매트릭스의 스미스처럼 복제된 자신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배치하면서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흩뜨린다. 그리고 주도양은 우리 주변의 익숙한 환경에 복수시점을 도입하여 사진을 합성, 편집함으로써 왜곡된 현실을 표현한다. 기이한 그의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곳이 현실세계인지 가상세계인지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현기증을 유발한다.

장 가브리엘 로페즈_W3_Lamda print_120×152 copy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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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양_Ojuk_Fuji Digital Print_125x123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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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다_겨울비-Winter Rain_ink-jet print_150×110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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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계단을 올라 <기억하기, 읽기, 쓰기> 전시실 앞에 들어서면 왼쪽 입구에 김희선의 싱글비디오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화면에는 둥그런 아날로그시계가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에 맞춰 돌아가고 있다. 빨라지는 소리의 템포에 맞춰 시계바늘은 유리에 중첩되어 비춰진 거리의 화면과 함께 점점 더 신속하게 움직인다. 구 서울역의 시계는 6.25 전쟁 때 잠시 멈춘 후 단 한 번도 멎지 않았기에 우리 근대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산증인임을 상징하고 이를 통해 장소성과 역사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녀의 또 다른 영상 <꿈꾸는 이의 소리>는 인터렉티브 비디오사운드설치 작업으로 기억 속에 각인된 파편을 재조합한다는 점에서 부제의 취지와 가장 부합되는 작품으로 주목할 만했다. 어떤 사건을 기억으로 재생해내는 과정이 마치 퍼즐을 풀어가는 것과 흡사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퍼즐을 풀도록 하고 모두 맞추면 작가가 주변사람들로부터 들은 타인의 꿈을 영상으로 볼 수 있게 한 작품이다. 다른 이의 무의식을 엿보기 위해 아무런 정보 없이 퍼즐을 맞추는데, 비논리적이고 우연한 상황을 쫒는 재미가 쏠쏠했다. 최예희의 싱글채널 비디오는 크고 작은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의 그림자가 비친 수면위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듯 계속적으로 아련한 파장을 일으키는 영상이다. 작가는 거울을 바닥에 놓고 계속해서 그 위에 물을 붓는다. 서서히 점진해가는 물결을 따라 눈과 마음을 움직이다 보면 마치 바다 속 심연과 같은 내 내면의 은밀한 곳을 여행을 하는 듯 편안하고 자유로운 느낌이 든다.

김희선_Time Apparatus, Single Channel Video_Sound Installation_ 5'29''_variable size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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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예희_Untitled_Single Channel Video_2'12''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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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읽고 쓰고 기억하는 것은 비단 작가의 활동에만 국한되는 행위가 아닌 개인에서부터 인류역사의 순환에까지 관여, 확장된다. 특히 쓰기는 어떤 방법보다도 더욱 강하게 인간의 의식을 변형해 왔으며 인간이 지금처럼 강력한 분석적 사유를 할 수 있게끔 하는데 커다란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런 점에서 누구든 이 큰 순환의 고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정도 작가된 마음으로 작품들을 대면하며 친근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리뷰를 쓰면서도 한 가지 아쉬운 점으로 남는 것은 각 전시실의 주제를 구지 혼돈스럽게 순서를 바꿔가며 구분을 지을 필요가 있었을까하는 점이다. 조금 더 부각되는 점을 주목해서 분류했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그 세 가지가 이합집산해서 모든 작품이 생겨난 것인데, 수학공식처럼 딱딱 들어맞을 수야 없겠지만 조금은 억지스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어쨌든 하이테크놀로지의 새로운 매체를 기대했던 애초의 필자의 예상은 빗나갔지만 그동안의 비디오 아트와 사진이 미술영역에 기여한 바를 되짚어 보고, 테크놀로지 예술의 시대라는 대변혁의 도래 앞에서 한번쯤 기술과 창작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전시였다.

* 본 리뷰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3.15아트센터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글. 박현희 (미술사, 경남도립미술관 인턴) timeless-79@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