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미디어아트 전시

좌표확인_모단 떼끄놀로지와 모던 테크놀로지 사이 _exhibtion reveiw

aliceon 2014. 1. 24. 19:10

 어릴적 서울역은 거대한 하나의 성이었다. 명절 대구 외갓집에 내려가기 위해 다다른 그곳은 거대한 아치형 입구로 맞이했고 너무도 단단하고 차갑고 굳건했던 계단의 레일은 한줌의 흔들림없이 나를 다음 공간으로 인도했다. 단단하고 거대한 대합실 공간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로 가득했으며 끊임없이 울리는 주목을 위한 기계음, 열차의 도착 및 출발 안내음으로 가득했다. 마지막으로 다다른 곳은 우주선과 같은 캡슐형의 창문을 가지고 있는 길고 긴 파란 강철 열차들이 즐비하게 모인 기계들의 휴식공간이었다. 차갑고 단단하고 굳건했으며 빨랐다. 모든 것들이 유동적이고 불안했지만 단단하고 안정적이었다.

 이러한 서울역에 <근대성의 새 발견 - 모단 떼크놀러지는 작동중>이라면 어떤 형태로 다가올 수 있을까. 우선 전시제목의 무서운 단어들이 압도해 들어온다. 사회학도이던, 역사학도이던, 예술관련학도이던 '모던'이라는 단어를 전공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대게 그 광범위하고 애매한 층위와 경계에 말을 꺼내기에 앞서 일단 머리를 쥐어잡을 것이다. '모던(modern)'. 모던하다.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와 학문에서 사용하는 의미는 서로 상당한 간극을 지니고 있다. 사전적 의미의 모던은 '현대의' 라는 뜻, 그리고 동시에, '근대 시기'라는 특정 시기를 지칭한다.
 일상적으로 '모던하다'는 현대적이다, 세련되다 라는 의미로 쓰인다. 모던 패밀리(modern family, 2009~) 라는 미국 드라마는 모던이라는 단어 내에 미국 내 '현대'에서나 볼 수 있는 가족들의 다양한 모습들, 예컨데 평범한 가족부터 시작해서 남미 출신의 미녀 가족, 게이커플과 그들의 입양아, 부유한 노회가족 등의 모습을 엮어낸다. 인피니티워드의 FPS게임인 <모던워페어(Modern Warfare)> 시리즈는 현대전 게임이다. 특수전 병력인 주인공들이 이끌어나가는 진행하는 게임 스토리에는 말그대로 현대의 정예 특수부대원들이나 사용할 법한 각종 강력한 현대전 무기들과 시스템, 교리들이 등장한다. 패션 디자인용품들이나 팬시아이템을 '모던하다'고 부르는 건 세련되었다라는 칭찬이다.
 반면, 학문적 용어로서의 모던은 우리가 살고 있는 그 현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동시대(Contemporary)이고 모던은 19세기 혹은 20세기 초중반까지의 특정 시기를 지칭하는 단어이다. '모던'이 지칭하던 그 당시의 맥락이 너무나도 큰 의미를 지녔기에, 그 당시의 '현대성'이 고유명사화 된 것이다. 이러한 시대를 이끈 사상인 모더니즘은 과거와의 결별, 그리고 새로 시작되는 세상에서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정신이며 이에 대한 발전적인 믿음과 실천이다. 산업혁명 이후 발달하는 기술, 문명과 그 결과물인 기계와 산업구조로 인해서 사회의 모습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물질에 강력하게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전제 하에 이러한 새태에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문화와 정신을 창조하려고 한 것이 바로 이 모더니즘이다.

 본 전시에서의 모던, 모더니티는 20세기 초중반의 시기이며, 그 시기를 대표하는 시대적 모습과 특징들이다. 그리고 이들 특징은 테크놀로지, 즉 기술을 통해서 드러난다라고 규정한다. 즉 본 전시의 시작은 역사적 시기로서의 근대라는 시기 규정에서 출발한다. 서울역은 20세기 초중반을 거친 역사적으로나 의미적으로 우리나라의 근대를 대표할 수 있는 장소이다. 또한 전근대, 근대, 현대를 가로질러 작동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공간 규정은 모던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진행적인 현상이며 '오늘'은 많은 시대적 특성이 뒤섞인 다층적인 시대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러한 시대를 꿰뚫으면서 명확한 대표성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 기술인 것이다. 전시는 크게 1층 중앙홀의 질서균형술을 기준으로 기계술, 근대이미지+철도술, 근대 관광여가술, 근대 소리술, 서울역-시간공간술, 근대 인물술, 근대 공간풍경술, 수직+수평술, 구조+건축술, 근대기록술 등 총 10개의 기술을 분류하여 소개하고 있다. 각 기술마다 선정, 분류된 25인의 작가들은 각자의 시각으로 기술을 읽어내어 그 기술의 형상과 기능이 가지고 있는 근대성을 해석해내고 있다.

<Chain Reaction-Movement Series Study, 권용철>

 [기계술]은 모던 테크놀로지를 대표하는 가장 커다란 부분일 것이다. 인간이 지구상의 생명 시스템 안에서 최상위 소비자로서 위치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소가 합리적 이성에 의한 환경의 이해와 이를 다룰 수 있는 기계술이라는 수단이다. 경제 구조적으로 전근대와 결별할 수 있게 한 시작점이었던 산업혁명의 격발점은 증기기관과 아크라이트 방적기라는 기계였다. 이를 통해 인간은 잉여생산물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통한 잉여자본은 사회 시스템을 송두리째 바꿔버린다. 바로 자본주의의 등장이다. 또한 이러한 자본주의는 재화를 통한 교환가치 개념을 확대시키고 본격적으로 인간과 물질을 강력하게 엮게 된다. 시스템과 사유와 행동양식 모든 것이 바뀌게 되는 시작점에 기계가 위치한다. 이렇듯 기계는 속도와 효율, 생산성, 물신화의 화신이다. 이 모습은 역동적으로 동작하는 기계들의 각 부위를 통해 이미지화되고 전달된다. 이러한 기계의 이미지는 [기계술]의 장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Chain Reaction-Movement Series Study, 권용철>

 근대시기의 기계는 오늘날 우리의 주위에서 작동하는 기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작동원리를 감추고 숨기는 오늘날의 모습과는 달리 이 기계들은 피스톤과 각종 암, 축과 베어링 등 운동부와 지지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있었다. 자세한 원리를 알지 못해도 적어도 이 부분이 어떠한 일을 하고 있는가는 명확히 드러난다. 전시장에 펼쳐진 기계들 역시 그 내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권용철<Chain Reaction-Movement Series Study>는 각 기계개체들간의 일련의 연쇄작용을 커다란 평면에서 표현한다. 각 기계들은 전선으로 연결되어 -무엇이 목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서로의 움직임에 호응하듯 순차적으로 자신의 몸체를 움직인다. 가지런히 나열된 이들 기계들의 모습과 움직임은 기계들의 집단 작업장을 연상하게 한다. 이광기의 <세상은 생각보다 허술하게 돌아간다>는 확실한 흐름이 드러나 있다. 복잡한 전선을 통해 전달된 전기는 선풍기를 돌린다. 선풍기는 바람을 만들어 저 반대편에 있는 바람개비를 돌린다. 그리고 바람개비의 돌아감은 다시금 카메라에 의해 캐치되어 프로젝션을 통해 영상으로 표현된다. 장치에 비해 엄청나게 긴 전선과 많은 수의 트랜스기는 모순적일 정도로 낭비적이다. 하지만 일련의 순서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우주+림희영의 <춤추는 가면_어둠을 먹는 기계>는 마치 마치 적도연안의 산호처럼 서서히 보일듯 말듯 신체 말단을 움직인다. 이 군체는 자신의 내부와 움직임의 매카니즘을 외부로 드러내며 스스로의 치밀함을 관찰할 수 있게 해준다.홍승표의 에칭 작품들은 [기계술]의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전통적인 평면 판화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역시 기계가 보여주는 체계적인 움직임에 대한 묘사가 두드러진다.
 기계 vs 인간의 차이 이외에도 근대와 그 이전의 노동의 차이라면 바로 이 드러냄이 있을 것이다. 중세시대의 수공예는 철저한 도제 시스템을 통해 노동의 모습을 철저하게 감추었다. 근대의 기계들은 스스로 어떻게 운동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역동적이고 가열찬 이미지를 전달한다. 인간의 인식 안에서, 혹은 인간의 노동을 통해 현실을 변형시키던 정역학, 동역학은 기계의 손을 빌어 더 크고 더 적나라하고 더 광대하게 주변을 바꾸고 더욱 대량의 물건을 만들어나간다. 또한 노동의 모습과 과정을 드러냄은 더육 효과적인 통제와 효율성을 기대할 수 있게 한다. 효과적인 자원과 노동의 매칭과 분배와 통제를 통한 균형감은 물질적 풍요를 약속했을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에는 기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기계는 근대의 대표성을 획득한다. '모단 떼끄놀로지의 기계'는 작동중이다.



<조선관광단, 권혜원>

 전시를 차지하고 있는 많은 부분은 근대를 잡아내고 선별한 이미지들이다. 근대는 보는 것이 아는것이라고 믿고 행동한 시각중심의 시대이다. 바라본다 라는 행위에는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는 과정이 동반된다. 이렇게 바라보는 나와 분리된 객체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분석이 가능하다. 이를 통해 객체를 설명할 수 있게 되고 또한 통제하고 지배해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공간풍경술]에서는 근대성에 의한 현상인 근대화의 여러 모습들이 모여 있다. 조춘만의 공단과 조선소를 위시한 거대한 기계 풍경, 강홍구의 여러 시간이 혼재되어 나타나는 도시 풍경, 정직성이 잡아낸 이성적 논리에 의해 때로는 해체되고 때로는 남겨져버리는 오래된 집단가옥들. 이 모든 풍경들은 오직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고 인간에 의해 유지, 보존, 폐기된다. 이들 만들어진 공간을 규정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다. [관광여가술]은 인간에 의해 또 다른 공간에 살고 있는 인간의 위계와 형식, 내용마저 제단되고 규정됨을 보여준다. 권혜원의 <조선관광단>은 힘의 논리에 의해 객체화된 조선의 공간과 인간이 송두리째 재규정됨을 보여주고 있다. 



<Metropolis Methaphor, 이배경>

중앙홀에 위치한, 말그대로 전체 전시의 중심에 존재하는 [질서균형술]은 본 전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근대성의 핵심일 것이다. 전근대의 무지와 비이성으로부터 결별하고,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진보의 힘. 그리고 인간의 이성과 지성에 대한 이 믿음. 지속불변한 발전을 약속하며 근대를 연 이 사고는 바로 그 질서와 균형에 대한 믿음이 그 중심이다. 하지만 이러한 강한 희망은 파시즘과 순혈주의, 그리고 최대 최악의 대량살상, 자기파괴의 극치였던 2번의 세계대전을 통해 송두리째 파괴되었다. 작가 이배경의 <Metropolis Methaphor>는 집단적,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이루어낼 수 있는 이상이었던 거대도시-메트로폴리스를 은유한다. 메트로폴리스는 자연적으로 만들어 질 수 없다. 기술에 의해 현실화되고 이성과 지성에 의해 유, 무형적 균형이 유지될 수 있어야 지속 가능한 거대 시스템이다. 구성원인 인간들이 이성적이기만 하다면 아무런 문제 없이 지속가능하겠지만 인간은 욕망한다. 인간의 본능은 더 나아간 무엇을 욕망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를 파괴한다. 동시에 이러한 자기파괴에 절망하면서도 더 높음을 원한다. 인간은 이러한 모순 속에서 끊임없이 파괴-재생을 반복하며 균형점을 찾으려 노력한다.
 본 작업은 만들어낸 사람이 목표로 하는 정사면체의 큐브를 상승기류의 흐름을 적절히 계산하여 중력에 반해 늘 공중에 부유토록 한다. 절묘하게 균형을 잡으며 부피에 걸맞지 않게 가벼이 부유하는 정사면체는 어찌보면 현실적이지 않게 느껴진다. 수월하게 믿기지는 않는 이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정사면체의 구성재질, 그리고 정교하게 계산되어 배치, 컨트롤되고 있는 팬(fan)의 회전속도와 각도이다. 하지만 공중을 유영하는 이 정사면체는 의도치는 않았을테지만 몇 분 간격으로 작품이 계산한 기류의 경계를 넘어 가장자리에 좌초한다. 전시장 도우미가 제대로 된 작동을 위해 정사면체를 가볍게 밀어 다시금 작동 가능한 공중 영역에 띄움으로써 이 부유는 유지된다. 유한한 현실, 무너지지만 다시 시도할 수 있는 현실. 다시금 안정과 질서 아래 사회를 작동하게 만들려는 노력이야말로 테크놀로지의 목적이며 근간일 것이다. 말 그대로 지금 이 시점에서도 '모던 테크놀로지는 작동중'이다.


 본 전시는 현 시대, 현 인간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자 스스로를 규정하는 중요한 모습 중 하나인 기술을 분류, 분석했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이 단순한 도구를 넘어 인간의 사유와 활동에 거대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근대라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건넨다. 근대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근대는 인간이 가진 자기 발전에 대한 욕망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구체화, 현실화한 시대이다. 그리고 지금도 이어져오고 있으며 과학과 기술이라는 인간의 대표적 사유와 행위를 통해 더 나은 사회와 더 나은 진보를 꿈꾸었고 어찌보면 한 극단에 다다를 수 있었다. 우리는 대안이 없을, 발전의 극한일 수 있는 기술과 자본주의의 말기, 한 시대의 절정을 지나 현재진행형의 종말이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르는 표류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때 근대성은 그를 좌표로 삼아 전근대성, 근대성, 현대성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오늘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지표일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시대이지만 여전히 발전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는 시대. 일정한 방향성이 있는 나아감은 한결 그 불안을 가라앉힐 수 있는 위안의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본 전시는 이런 좌표설정의 측면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어디에 발을 디디고 있는지를.

 전시는 다수의 사람들을 위한 콘텐츠이고 그만큼 이목을 잡아끌 수 있는 기술, 본 전시의 방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주목술]이 중요하다. 그 시작부터가 한국의 근대사에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으며, 그 스스로도 여러 근대성을 대표하는 서울역은 이를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강점과 의미를 톡톡히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주제와 아우러진 이 특정 공간은 강력한 설득력을 지닌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모던'이라는 개념에 대한 언급이나 소개 없이 모던=테크놀로지라는 등식만을 전제로 조금은 성급하게 서술되었다는 느낌이 없잖아 존재한다. 관람 후 전시장을 나오던 인파 중에 섞여있던 두 커플의 대화가 다시금 떠오른다. "야, 그럼 모던이 뭐라는 거야?"


글. 허대찬(앨리스온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