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report

YCAMPost #10_이케다 료지의 데이터매틱스datamatics_world report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4. 16. 23:17

햇살이 내리쬐는 조용한 로비를 지나 스튜디오A로 향한다.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전시장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빛은 사라지고, 어둠과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전자음이 주위를 감싼다. 좀더 들어서면, 새까만 공간에 가늘고 긴 선이 앞을 가로막으며 명료하고 눈부시게 빛난다. 선의 명료함은 그것을 둘러싼 공간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 내고, 부유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선에 다가가면, 선은 면이 되고, 숫자 픽셀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는 필름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빼곡한 숫자들 사이로 다른 한 차원이 더 보이는 듯 한 착각이 눈을 어지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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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을 지나 전시장에 들어서면 스튜디오A의 거대한 검은 공간이 펼쳐지고, 정면에는 숫자와 알파벳들이 픽셀처럼 가지런하지만, 실체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화면을 가르고, 채운다. 환경음처럼 들리던 전자음은 선명하게 들려오면서, 영상과 함께 점멸한다. 사운드는 명쾌하고 날카롭고 차갑고 단조롭지만, 리드미컬하다. 공간을 배회하는 몸의 움직임에 따라 사운드의 풍경은 변화하고, 새로운 얼굴들을 보여준다. 넓은 공간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한 지점에 멈춰 한참 동안 보고, 듣다 보면, 심장박동이 전자음의 리듬에 맞춰져 가는 것 같기도 하고, 나 자신이 영상과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시스템에의 입력이 되어 시스템을 통과하고, 숫자와 전자음으로 변해가는 듯하기도 한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부시시 일어나 전시장을 벗어난다. 밝은 빛이 눈을 찌푸리게 하고, 조용한 로비를 지나는 동안 전자음의 잔향殘響이 귀를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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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올라 스튜디오B로 향한다. 안으로 들어서면, 다시 어둠이다. 바닥에 일렬로 가지런히 놓여있는 8개의 모니터 위를 선들이 명멸하며 지나간다. 그 주위에 나란히 설치되어 있는 8쌍의 스피커에서 나는 전자음은 조용히 지글대면서 커지고 작아짐을 반복하다가 일순 한끝에서 다른 끝까지 전시공간을 날카롭게 관통한다. 모니터 사이를 거닐며 그 소리를 들으면, 마치 내 몸이 사라지고, 몸이 있던 공간을 소리가 그대로 꿰뚫고 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최면에 걸린 듯 오가는 사운드와 영상의 반복에 빠져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오면, 몸이 발로 딛고 서 있는 공간과는 다른 어딘가에 빠져 있다가 나온 것 같은 실체 없는 경험의 기억만이 몸을 울린다.

감각적인 경험을 촌스럽지 않게 말로 표현해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경험을 촌스럽게 흩뿌려놓으면서 장황하게 글을 시작하는 것은, 지금 YCAM에서 전시되고 있는 이케다 료지의 데이터매틱스datamatics 전을 감상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작품 자체의 경험, 즉 작품이 존재하고 있는 공간과 작품이 만들어가는 시간에 따른 현장에서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케다 료지의 작품들은 일련의 개념적인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지만, 그것은 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작가의 과정이다. 작품이 완성된 후, 전시된 후에 이루어지는 관객의 감상은 그와는 별개의 것으로 작품을 보고 느끼는 개인적인 경험이 가장 중요하고 작품 자체를 경험함에 있어 자신의 코멘트가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이케다 료지는 창조의 과정에서 다루어졌던 개념적인 부분들에 대한 언급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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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 아티스트 이케다 료지池田亮司

이케다 료지는 일본을 대표하는 전자음악 작곡가/아티스트로서, 초음파, 주파수, 그리고 사운드 등이 갖는 본질적인 특성의 세밀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의 작품은 사운드의 물리적인 속성과 인간 지각과의 인과관계, 음악에서의 수학적 유추,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활용한다. 컴퓨터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극한까지 구사하면서, 사운드 엔지니어링 및 작곡에 있어,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을 발전시키고 있다. 시각적 미디어와 청각적 미디어를 모두 잘 활용하는 작가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고, 콘서트와 전시를 통해 사운드, 음향 그리고 압도적인 영상들을 총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케다의 작품들에서 음악, 시간, 공간은 수학적인 방식으로 구성되는데, 소리의 물리적인 특성으로부터 인간의 지각에 접근하고, 그 관계를 밝힘으로써 감각으로서의 소리를 탐구하고 있다. 그의 오디오비주얼 콘서트 데이터매틱스datamatics (2006- ), YCAM에서 제작된 C4I (2004-2007), 포뮬러formula (2000-2006) 시리즈들은 미래의 멀티미디어 환경과 문화에 대한 독특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고, 설치 작품 데이터.트론[프로토타입] data.tron [prototype] (2007), 데이터.필름data.film [nº1-a] (2007), 데이터.스펙트라data.spectra (2005), [JFK터미널5을 위한] 스펙트라spectra [for terminal 5, jfk] (2004), 스펙트라II spectra II (2002), db (2002) 등은 미술계에 ‘초미니멀리즘’이라고 하는 이케다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카스텐 니콜라이Carsten Nicolai, 안무가 윌리엄 포사이스William Forsythe, 덤타입Dumb Type와 같은 다양한 아티스트들과 함께 작업하기도 했다. 2001년 아르스 일렉트로니카의 디지털 음악 부문에서 골든 니카를 수상하기도 하고, 퐁피두 센터, 테이트 모던, MIT 등 명망 높은 곳들에서 작품들을 선보이기도 하면서,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데이터매틱스 전시 홈페이지http://datamatics.ycam.jp/의 작가 소개 요약)

데이터매틱스datamatics

이케다 료지의 데이터매틱스는 영상, 사운드, 설치 오브제 그리고 뉴 미디어를 아우르는 다양한 소재들로 만들어지고 있는 작품 시리즈로, 현실에 대한 추상적인 조망인 데이터가 세계를 기호화하고, 이해하고, 컨트롤하는 데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각 미디어의 해상도에 따라 우리가 그런 데이터들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YCAM에서는 시리즈와 같은 제목으로, 이케다 료지의 기존 작품 두 개와 이번에 YCAM에서 제작된 신작 하나가 전시되고 있다.

먼저 스튜디오A에 들어서자마자 설치되어 있는 데이터.필름data.film[n01-a](사진1.)은 10m 길이의 35미리 필름(일반적인 영화 필름)을 높이 4cm, 폭 10m, 깊이 5cm의 라이트 박스에 설치한 작품으로, 필름 전체 즉 필름의 사운드 트랙과 타임 트랙 부분에 이르기까지 숫자들이 정교하게 프린트되어 있다. 정적인 오브제로서, 그 자체가 변화하지는 않지만, 작품과 관객의 거리에 따라 1차원에서 2차원으로 확장되고, 2차원의 평면상에 빼곡하게 나열되어 있는 숫자들은 아주 가까이에 다가섰을 때에만 모습을 드러낸다. 극장으로도 쓰이는 거대한 스튜디오A의 공간에 폭 10m, 높이 7.5m의 스크린을 채우는 데이터.트론data.tron(사진2)은 오디오-비주얼 설치로서, 영상을 구성하는 각각의 픽셀은 세계를 구성하는 수많은 데이터들을 수학적 원리에 따라 엄밀하게 계산한 결과들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데이터.트론을 구성하는 숫자와 알파벳들은 무언가를 표상하고 있는 기호 같긴 하지만,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가면서 어느 순간 기호가 아닌 패턴 자체로 보이기 시작하고, 그 패턴의 연속이 영상이 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숫자나 알파벳이라는 픽셀과 같은 점으로부터 시간의 흐름으로 만들어지는 영상에 이르기까지 차원이 확장해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오프닝 라이브 콘서트도 이 곳에서 열렸는데, 이상적인 장비들이 갖추어진 가운데 (이케다 료지는 YCAM이 만들어질 당시, 사운드 시스템을 설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케다 료지 특유의 전자음들을 영상과 함께 시∙청각, 그리고 촉각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인상 깊은 체험이었다. 특히 데이터.트론의 설치보다 훨씬 역동적인 작품을 보면서, 설치작품과의 대조를 직접 느껴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마지막으로 스튜디오B에 설치되어 있는 작품은 테스트패턴test pattern[n01] (사진3)으로써, 8개의 모니터와 8쌍의 스피커로 구성되어 있다. 모니터들을 가로지르는 영상은 스피커의 소리에 반응하는데, 스피커로부터 들려오는 전자음은 서서히 커지다가 날카롭게 공간을 가르고 그에 따라 영상도 눈을 찌르듯이 밝아졌다, 사그라졌다를 반복한다. 그러면서 영상도 사운드도 그것을 전달하는 매체 자체를 실험test하듯 극단으로 몰아간다. 이 작품에서 실험대상은 비단 매체뿐만 아니라 관객의 감각이기도 할 것이다.

Composing Elements

작곡가임에도 불구하고, 이케다 료지가 작품에 활용하는 소재들은 사운드로부터 영화 필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그것을 전달하기 위한 매체도 스피커에서 라이트박스까지 여러 영역을 넘나든다. 이러한 작업 전반을 그는 음악적인 구성composition이라고 표현하면서, 그 소재가 빛인지, 소리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소재와 매체의 본질, 특히 어떤 매체가 만들어내는 경험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바에 가장 적절한 매체를 파악하고 조합하여 구조화하는 것이 그에게는 하나의 음악적인 구성의 작업인 것이다. 그래서 아이디어가 물질화되거나 형태를 갖추기 이전의 메타 단계에서의 구성이 이케다가 해왔고, 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활동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한 메타 단계에서의 논리와 철학에 대한 관심을 확장하여 이케다 료지는 최근 세계 유수의 수학자들과 교류하면서 다음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