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미디어아트 전시

Media City Seoul 2010: TRUST 믿거나 말거나_exhibition review

aliceon 2010. 11. 9. 18:23

“상상력이 부족한 이들은 무엇이 부족한지 상상할 수 없다.”
(68혁명 구호, 잘랄 투픽의 “베이루트의 불문율과 쓰여지지 않은 슬로건들”에서 재인용)

1. 비엔날레가 성업중이다. <월간미술> 9월호는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 미디어시티를 비엔날레 ‘빅쓰리’로 꼽아서 소개했다. 이 외에 군소규모의 비엔날레도 두 개 정도 있으며, 비엔날레는 아니지만 인천에서 열리는 인다프(INDAF, 인천국제디지털아트페스티벌)도 있다. 이름만 건 듯한 두 곳을 제외해도, 한 해에 대규모 국제미술전시가 자그마치 네 개나 열리는 셈이다. 한 때는 비엔날레에 이름 석자 올리는 것만으로 언론에 기사가 났을 정도였는데, 이제는 국제전시를 개최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참으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어느덧 광주비엔날레가 15살, 부산비엔날레와 미디어시티가 10살이 되었다. 중간 중간 우여곡절도 없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안착한 것처럼 보인다. 어찌됐든 말이다.

2. ‘비엔날레’는 원래 2년마다 열리는 국제전시를 가리킨다. 그러나 시기의 의미는 그다지 없으며, 거창하게 말하면 지구적 차원의 미술적 표현이다. 일정한 시기에 지역을 가로질러 상호 접속하는 작품의 ‘개념적 표현’이란 것. 여기서 비유를 들어보자. 하얀 종이에 다섯 개의 도형이 있다고 치자. 그리고 각자 생각대로 도형을 이어보자. 사람마다 여러 가지 형태를 그릴 것이다. 원을 그리는 사람도 있을 테고 삼각형을 그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 두 곳을 빼는 사람도 있을 테고, 모조리 잇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선의 종류도 각자 다를 것이다. 뚜렷한 직선을 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는 선을 여러 개 겹치는 사람도 있다. 개념이 하는 일이 그렇다. 사람들 각자 자신의 개념을 통해서 ‘재현’을 한 것이다. 개념이 충만한지 빈약한지 상관없이 말이다. 처음에는 긋는 것만으로 중요했을 것이다. 미술로 세계를 담는다니, 이 얼마나 원대한 기획인가.

3. 이것은 현대미술에서 발생한 두 가지 변동을 일러준다. 첫째, 개념미술의 출현을 반영하는 것. 반성하는 미술이 아예 철학하는 미술로 ‘진화’했다. ‘적자’의 출현은 당연했다. 둘째 기획자의 시대가 등장한 것. 개념을 쓰고 만드는 사람은 이론가다. 이론적 역량을 갖추 기획자의 시대가 출현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처음에는 개념이 미술 내부로 침투했다가, 이후에는 아예 개념을 축으로 배치되는 식으로 전화된 셈이다. 그것이 ‘선긋기’의 의미고, 개념의 역할이다. 그래서 궁금한 것이다. 김선정은 <미디어시티 서울 2010>에서 어떤 개념을 들고 나왔을지, 자신의 개념으로 어떠한 형태를 꾸며놓았을지.  

4. 기획자의 서문은 개념의 지도다. 특히 비엔날레처럼 대규모 기획전일 경우, 지도는 반드시 필요하다. 연출로 개념을 ‘표현’한다고 해도, 각기 작업의 속삭임 때문에 길을 잃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면 미디어시티의 기획자 김선정은 무엇을 노리고 있을까. 우선, 그녀는 비엔날레의 이름부터 바꾼다. ‘서울 국제 미디어아트 비엔날레’라는 공식명칭을 대신해 ‘미디어 시티 서울’을 제안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이번 미디어 시티 서울은 ‘미디어아트’라는 용어가 미술을 미디움 즉, 재료로 국한시키는 한계성을 인식, 보다 확장된 의미의 미디어를 재정립하고 그 의미를 확대시키기 위해 미디어 시티 서울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자 한다.” 즉 김선정은 ‘미디어아트 비엔날레’에서 ‘미디어아트’를 없애기 위해서다. 한마디로 ‘구조조정’을 단행한 것. 이름을 바꾸고, 주체를 바꾸는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가 보기에, 1회 미디어_시티 서울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관례적인 형식을 벗어나지 않았고, 매체예술의 흐름 이상을 보여주지 못했다. ‘매체’를 미술관 내부에 가두어 놓았다는 얘기다. 오히려 1회가 나았다. 그때는 매체예술에 국한되지 않고서, ‘매체-사회-문화’를 통합하여 미술을 넘어서는 표현을 서울 곳곳에서 보여줬기 때문이다.


5. 김선정의 진단이 틀린 것은 아니다. 1회를 제외하면, 미디어시티는 여느 비엔날레와 크게 다르지 않은 형태였으니까. 그 때문에 그녀는 돌파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국내외 유수의 비엔날레와 자웅을 겨루기 위해서는 나름의 경쟁력과 독특한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확장된 의미의 미디어를 재정립’은 그래서 나온 구상이다. 그러면 실제의 전시는 어떨까. 확실히 눈에 띄는 ‘매체예술’ 작업을 찾기는 어려웠다. 물론, 싱글채널비디오 작업도 있고, 상호작용을 유도하는 작업도 있다. 게다가, 예전의 미디어시티를 생각하고 갔으면, 일층에 늘어선 노순택의 사진을 보고서 조금은 당황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매체의 정의를 폭넓게 잡으면 사진도 들어갈 수 있을 테니 넘어가자. 중요한 것은 개념일 테니까. 그런데 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작업의 장르는 그렇다 쳐도, 이전의 관례적인 비엔날레 형식도 벗어나지 못한 것 아닌가. 경희궁분관, 역사박물관, 심슨기념관 등등, 전시공간을 늘렸다고 항변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적어도 미술관을 박차고 공공장소로 뛰쳐나온 것은 아니다. 용두사미가 아닐 수 없다. 하기야 전시형식보다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 넘어가자. 중요한 것은 ‘개념’일 테니까. 그런데 기획자가 제시한 개념이 자못 난처했다. TRUST.

6. 솔직히 처음 보았을 때 어리둥절했다. 매체예술과 트러스트의 짝패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기획자의 말을 들어보자. “오늘날의 미디어에서는 미디어가 지녀야 하는 사회적 책임이나 가치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상호간의 신뢰 즉 트러스트가 유효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김선정의 말대로, 오늘날 매체는 신뢰가 바닥 난지 오래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는 현실, 여기서 매체는 진리의 전달은커녕, 오해와 불신을 키우는 주범으로 전락한다. 소통은커녕 먹통만 일으킨 다는 것. 특히 한국은 언론재벌과 재벌언론 때문에 ‘언로’가 심각하게 왜곡되지 않았는가. 그러니 ‘트러스트’를 매체예술 비엔날레의 주제로 삼는다고 딱히 문제될 것은 없는 것 같다. 현실적으로 비엔날레 같은 대형전시의 경우 화두를 잡는 것이 어렵기도 하며, 워낙에 숱한 비엔날레가 다양한 주제를 다뤘기 때문이다. 비엔날레 형식의 잠재력도 소모됐다는 것이다. 다만, 단서는 붙어야겠다. “전시 주제 트러스트는 이를 위한 개념적 장치다. 우리는 그 형태가 다양해지고 대중화된 미디어가 현대사회의 구조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반영하고 비판할 것이다.” 적어도 기획자 본인이 제안한 의도와는 부합해야 하지 않을까. ‘매체변동에 따른 사회변화’는 너무나 고전적이다. 게다가 최근의 매체환경은 10년 전과 또 다르게 급격히 재편되는 상황이다. ‘트러스트’는 맥루한의 시대로 퇴행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7. 더욱 괴이한 것은 ‘트러스트’의 이론적 전거다. 기획자가 끌어오는 개념은 후랜시스 후쿠야마의 ‘신뢰’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 (1992)에서 자본주의를 등에 업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로서 역사의 시대는 끝났다며, 전세계 우파의 나팔수 노릇을 톡톡히 했던 것으로 유명한 학자다. 그랬던 후쿠야마가 생각하는 신뢰란 무엇이며,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설명하고 있을까. “사회적 자본은 그것이 통상 종교나 전통, 역사적 관습 등 문화적 기제를 통해 창조되고 전수된다는 점에서 다른 형태의 인적 자본과는 차이가 있다…달리 말하자면 사회적 자본은 개인 각자가 자기 나름대로 행동해서는 획득될 수 없다. 사회적 자본은 개인적 덕목이 아니라 사회적 덕목에 기초하고 있다.” 여기서 ‘신뢰’는 ‘문화와 도덕의 수준’ 정도로 보면 맞겠다. 후쿠야마는 이러한 신뢰를 ‘사회적 자본’으로 환산한 다음, 이 자본의 축적여부에 따라 선진국과 후진국이 갈린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똑같이 자유민주주의 채택한 국가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공적인 신뢰가 사회를 판가름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한국이 경쟁력을 확보해서 선진국으로 발돋움 하려면,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관건이며, 매체는 중간에서 신뢰의 회복에 도움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진단하는 문제도 그렇고 해결하는 방법도 그렇고, 그녀의 시계는 1990년대에 멈춘 것 같다. 어쩌면 그 이상일 지도 모르고.

8. “혁명은 권력자가 꾸는 꿈의 불가능성에 대한 각성이다.”(잘랄 투픽) 그랬기 때문에, 도록 중간에 실린 잘랄 투픽의 글은 굉장히 생뚱맞았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소리’를 울리는 가운데, 베이루트의 기막힌 ‘현실’을 토로하며 68혁명의 ‘과거’를 소환하는 주술을 듣기란 매우 거북했기 때문이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뉴욕 뉴욕>이 울려 퍼지는 양키스야구장에서 팔레스타인 민중이 이스라엘 군인과 친선 야구를 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물론, 이러한 심사는 도록에만 그친 게 아니라, 전시를 보는 내내 지속됐다. 그야말로 거칠기 짝이 없는 현실이 (전시)매체를 통해서 표면이 반들반들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9. 문제는 또 있다. 클라라 킴, 니콜라우스 샤프하우젠, 스미모토 후미히코, 세 명의 큐레이터가 생각하는 ‘신뢰’가 어쩐지 다르다는 것이다. 먼저, 클라라 킴은 ‘신뢰’의 개념을 별달리 언급도 않는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이론을 끌어와 새로운 매체가 상상케 만드는 ‘공동체’를 설명하면서, ‘기술의 약속’도 ‘매체예술’ 용어의 물신화도 물리치고는 매체일반의 시각으로 돌아갈 뿐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를 재조정하는 일련의 개입이라는 관점에서 예술생산의 문제에 관심을 돌렸다.” 그러니 시야에 잡히는 것은 ‘차이의 공동체’와 ‘미시서사’다. 이 역시 후쿠야마가 다 지워버린 역사‘들’이다. 샤프하우젠도 미묘하기는 마찬가지다. 루만의 이론을 끌어들여, 신뢰는 불신과 한 짝이며, 매체를 양날의 칼로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또 그래야 전시도 흥미롭고. “미디어시티 서울 2010이란 이름을 걸고서 매체비엔날레 형태로 선보일 이 전시에서 매체의 개념은 의심받는 동시에 포용된다. 규준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그것을 의심도 하여야만, 예술성과 주제성 모두가 흥미로운 기획이 될 수가 있다.”(번역이 이상해서 다시 옮겼다. 중역 때문인지 번역 때문인지 모르겠다.) 스미모토 후미히코는 매체가 개인과 공동체에 미친 충격을 문제로 삼고서, 매체가 설정한 창문 바깥에서 배회하는 표현들을 탐색한다. “‘창’의 안쪽에 제시된 정보가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라고 확실하게 가리킬수록 누가 또는 무엇이 그 경계를 결정했는가를 사람들이 점점 더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체로 매끄럽게 다듬어지지 않는 개별자들의 목소리가 중요하다. 자, 정리해보자. 세 명 모두 개념은 분명하다. 미시서사-매체의심-복수시각, 엮어보면 나무랄 데 없는 개념군이다. 그런데 매달린 줄기가 역시 문제다. 역사도 끝났으니, 사회적 자본을 확충해 경쟁력을 높이자는 줄기가 아무래도 거치적거린다. 신자유주의식 ‘신뢰’에 탈근대의 개념인 ‘미시서사-매체의심-복수시각’이라, 포스트모더니즘식 농담인가. 나로서는 모르겠다.


덤. 김영하의 선문답 같은 소설은 왜 들어갔을까. “그녀의 피부가 눈부셔 모두가 눈을 감았다.” 내 눈도 감겼다.

덤. 잘못된 번역도 있는 것 같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According to Luhmann, mistrust is the functional equivalent of trust since both reduce complexity and both determine how we interface with instutions.” 굵은 글은 오타로 보이며, 역자는 ‘직관intuition’으로 번역하지만, 루만의 사회체계 이론을 생각하면, ‘제도institution’로 옮기는 게 알맞아 보인다. 따라서 이렇게 번역해 볼만하다. “루만에 따르면, 불신이 신뢰의 기능적 등가인 이유는 양자 모두 복잡성을 줄이고, 사람들이 제도와 접촉하는 방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151쪽) 전반적으로 번역문을 읽기가 힘들다.


김상우(미학, 기술미학연구회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