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미디어아트 전시

육태진 회고전 | 미디어를 통하여 인간은 실존한다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 15. 21:06

우리는 쇼윈도를 들여다보는 것에 의해 끊임없는 변화에의 적응성과

사회에의 순응성을 테스트받고  유도된 자기투영능력을 시험당한다.

- Text in the <Conceptual box>

 

최근 출시되는 텔레비전 수납/장식장의 전면은 투명하게 만들어진다. 일단 리모컨 신호가 관통할 있어야 하고, 셋톱박스 외에도 다른 외부입력 장치가 추가될 경우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스크린이 놓일 자리는 개방적인 곳으로 상정되어 있다.

처음 텔레비전이 가정으로 보급되었을 당시의 다른 가구들도 육중했지만, 어린 시절 보았던 텔레비전 수납장은 마치 단단한 갑옷과 같은 모습으로 기억한다. 시청하지 않을 때는 브라운관 전면부를 닫아 놓을 수도 있었는데, 문을 열었을 금고가 나타난다고 해도 좋았을 법한 모습에는, 지금이라면 고가의 홈시어터 시스템에 맞춤식으로 제작한 가구를 갖추면 어울릴 것만 같은, 어떤 기계에 대해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때가 백남준이 갤러리에 텔레비전 수대를 들여 놓은지 20 후였다. 또한 때로부터 20 사람들은 컴퓨터 모니터에 여러 개의 윈도를 띄울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은 손에 각자의 스크린을 들고 다닌다.

작가가 미술계에 발을 들여놓은 때는 30 전이다. 4개의 방으로 나뉜 회고전의 마지막 방에서 작가의 생전 모습이 담긴 영상을 있었다. 영상이 걸려있는 파티션 너머로는 <보행자>에서 출력되는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고, 생전 처음 보는 누군가의 움직임과 목소리가 담긴 영상을 보며, 스스로에게 떠오른 ‘안타까움’과 유사한 감정에 대하여 나중에 다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때가 글의 출발점이다.

 

백남준이 텔레비전을 표현수단으로 삼은 것이 전략적 선택이었다면, 작가에게 텔레비전과 같은 영상매체는 태생적 환경이었다. 현재의 매체들이 사용자들의 필요나 취향에 따라 다각적으로 접근하고 사용자로 하여금 개인화시킬 것을 요구하는 특징에 반해, 당시의 매체들에는 되지 않는 채널을 돌리는 외에는 사용자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없었다.

과거에 비해 자유로워졌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미디어에 깊이 매혹되어 있다고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의 텔레비전이 실시간으로 사람들 마음에 드는 세계를 보여주는 창문이었다면, 현재의 스크린들은 스스로가 데이터-환영임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과거의 기능을 잃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창문에 환영이 보이는 것을 알지만, 환영들을 통제할 힘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그와 같은 힘은 데이터 내부구조를 해부하여 해킹을 하거나, 스크린 표면의 의도를 헤아려 사용자 나름의 인터페이스를 구성하는 경험에서 발생한다. 그런데 미처 우리가 바라보는 창문이 데이터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지 못했던, 혹은 알더라도 창문을 열고 닫는 외에는 마땅히 통제할 방법이 없었던 과거에는 어떨까.

백남준처럼 브라운관에 자석을 대고 랜덤액세스를 주장하거나, 아예 국제적 규모의 방송 퍼포먼스를 벌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백남준에게 매체는 몰입이나 자기 반영의 대상이 아니라, 자아의 상호전환과 병렬화가 가능한 공간이었다. 그런 경향은 결과적으로 94 대전 엑스포 만들어졌던 <프랙탈 거북선> 같은 ‘멀티’적 경험을 위한 형태로 나아가게 되었다. 대전시립미술관의 계륵과 같은 작품은 현재 미술관 로비에 자리하고 있었다.

반면 작가의 경우에는 매체가 갖고 있는 공간적 요소에 주목했다. 공간은 작품의 질량을 구성하는 유물론적 입자라기 보다는 매체가 자리잡고 있는 부피에 가까운 개념이다. 공간은 매체를 담고 있지만, 안에 들어가려 하면 침입자의 비중만큼 매체의 일부가 빠져나간다. 다가가는 만큼 멀어지는 신기루처럼 말이다. 작가에게는 격차가 매체를 불신해야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오히려 몰입과 염오라는 격차만큼 일종의 실존을 경험하지 않았을까? 100 시인들이 초기의 산업 도시에서 현대성을 예감했던 것처럼, 작가는 현실이 아니었던 매체 속의 공간이 서서히 인간을 침식하는, 혹은 인간이 매체 속으로 침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전시실에 들어섰을 처음 만나는 작품은 <우편엽서를 꿰뚫어보기>. 엽서를 꿰뚫어보면 무엇이 보일까. 보내는 사람에서 받는 사람까지 우편엽서가 전달되는 시스템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그러한 시스템을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작품은 제목 그대로를 물리적으로 실행해버렸다. 최초 형태의 비례는 유지한 면적이 줄어들도록 일정비율로 가장자리를 잘라낸 엽서들을 전후로 쌓아 팔면체를 만들고, 엽서 중앙의 위치에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장착했다. 작품의 지시문을 따라 뷰파인더를 들여다 보면, 작가의 유일한 조소 작품인 <Moonlight> 갤러리 중앙에 자리하고 있고, 벽면에는 상자 형태의 작업들이 놓여져 있는 프레임이 나타난다.

엽서의 ‘전달’과 카메라의 ‘투시’ 기능이 합쳐진 작품은 흡사 요즘의 스마트폰과 같은 기계를 떠올리게 한다. 아울러 렌즈 너머가 아니라 렌즈를 담고 있는 엽서라는, 작품을 오브제로서 공간 상에서 ‘들어낸다면’, 렌즈가 자신을 들여다볼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인간의 눈을 바라보는 매체의 렌즈를, 혹은 현실을 지시한다기 보다는 소환하는 역할의 스크린을, 종이 재질의 엽서를 레이어처럼 쌓아 구현한 셈이다.

방금 뷰파인더로 보았던 공간으로 직접 걸어가 보기로 하자. 나무로 상자들이 곳곳에 있다. 작가가 ‘기계장치’들을 담아내는 틀로 즐겨 사용했던 고가구들도 보인다. 상자들은 인간이 도구로 사용하는 공간으로, 인간을 담아내는 육면체의 안에 있는 다른 상자였다. 우리 할머니나 어머니들에게는 자부심이 걸린 공간이기도 했다.

이 곳 상자들은 2가지 타입으로 나뉜다. 가구 형태를 살린 작품은 가구 자체가 지닌 실용성과 대비되는 손금(운명?), , 공기, 소리 다소 추상적인 개념이 들어있다고 지시되고, 전면부를 아크릴로 개방한 상자 형태의 작품에는 지구본, 기타, 목판, 도색잡지 등의 사물들이 삽입되어 있다. 전자의 경우 가구의 서랍이나 문을 열어본다거나, 가구에 장착된 돋보기를 통해 손금을 들여다볼 있게 함으로써 관람자의 참여를 의도했다. 이는 후자의 기존의 사물을 상자 형태로 재매개한 작업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후자의 경우 기존 사물의 일부 기능이 작품의 메시지로 강조되는 효과와 함께,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몰입성까지 확보하고 있다. 이는 상자라는 프레임에 맞춰 기존 사물이 리모델링되면서 나타난 결과인데, 작가는 이에 더하여 개념미술적 게임의 공간을 의도했다.

상자 형태의 작품에는 전면부 아크릴에 원형으로 잘라낸 원둘레에 PUT YOUR HAND AND...’와 같은 안내문이 쓰여 있다. 렌즈와 브라운관 사이의 공간에 손을 집어넣어 이미지를 만진다는 착시 경험을 동전 개로 팔았던 유원지의 오락기계들에서 차용한 것이라는데, 상자 형태의 작품 <기타>, <우편엽서 56>, <Conceptual box> 등등 작품마다 조금씩 고친 문구들이 들어가 있다.

<파리애마> 같은 작품에서는 이와 같은 작가의 스타일이 일종의 브랜드 내지 슬로건처럼 고스란히 프린트된 민소매 티셔츠들이 파리애마 포스터가 들어있는 상자 주변에 걸려 있었다. 당초 의도했을 섹슈얼리티 차원의 도발 효과를 차치하고서라도, 지금 시점에서는 위트가 가미된 레트로 스타일로 다시 읽을 있는 부분이었다(게다가 원둘레 위의 영문은 고딕체, ‘맥을 짚듯’이라는 한글은 궁서체). 지금 옷을 입는다면 능청스러운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어쨌든 작가의 수법들은 작품마다 반복-각색되어 사용되는데, 엽서 쌓기는 <배트남 관광>에서 신문지 쌓기가 된다. 가구 형태의 작업들은 텔레비전과 결합되어 2전시실 후반부 작품으로 재탄생되기도 한다. 또한 생체적인 시야 이상으로 공간을 점유하는 경향이 나타는데, <Sexual box>는 도색잡지 이미지를 담은 상자에 이중 아크릴 앞뒤로 <비행사의 >라는 텍스트를 삽입하여, 몰입과 염오라는 양가성 혹은 관람자로 하여금 시각의 주체를 역전시키는 효과를 통해 매체라는 공간(혹은 매체적 경험)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파리애마>에서는 작품 자체가 하나를 점령하고 있는데, 매체가 현실계에 미치는 파괴력을 실감하게 한다. 물론 <파리애마> 작품에 삽입된 영화 포스터나 광고에 사용된 카피들은 과장된 섹스판타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고, 그렇게 진지하게 위장된 욕망은 당시에도 실소를 자아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2전시실 전반부의 작업들은 더욱 공격적이다. 1전시실의 작업에 비해 직설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고, 메시지를 표현하는 ‘정지된’ 이미지들은 기계장치의 도움을 받아 벽면에 떠다닌다. 1전시장의 작업들은 텔레비전, 잡지, 영화, 기타, 엽서 등의 도구-매체들을 분해하여 가구-상자라는 도구-매체로 옮겨간 형태를 취했다. 정지된 프레임을 재생하는 몫은 관람자에게 있어 보였다. 반면 2전시실 작품의 이미지는 자체적으로 흐르고 있다.

2전시실 전반부의 작업에서 보이는 이미지들은 당시 대중매체에서 유래하고 있다. 물론 <애국자 게임> 신호등에서 안노 히데아키를 먼저 떠올리고, <광고 발칸포>에서 ‘음향대포’가 생각나는 만큼의 시대적 격차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 손금에서 자라나는 무지개> 사용된 광고들을 보며 과거의 어느 순간을 떠올릴 사람도 아직 많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롯데월드는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 보드리야르가 디즈니랜드를 언급했을 즈음 세워진 롯데월드는 당시 한국에서 유일하게 유럽판타지가 구현된 테마파크로 쇼핑이나 에스테틱 등의 복합 엔터테인먼트까지 시도한 공간이었다. 다만 신기한 점이 있다면, 의무교육을 받는 도중의 인간이라면 통과의례처럼 지나는 테마파크 중 하나인 롯데월드를 생각하면 아무런 이야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홍보용 캐릭터의 이미지조차 기억에 희미하다. 

롯데월드 홍보부서의 도움으로 다시 제작될 있었다는, <롯데월드 II> 통해 그곳의 스토리를 확인할 있었다. 어두운 한가운데 테이블 아래 놓여 회전하는 사이렌 불빛이 사방으로 도배된 롯데월드 브로셔들을 스치고 있다. 테이블 위로는 제대로 안을 들여다볼 없는 사각형 상자가 자리하고 있다. 왜냐하면 투명한 상자의 겉면에는 시인 유하가 배우 심혜진을 소재로 텍스트가 빼곡히 적혀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당시의 사회를 소비명승지나 대중매체 스타, 정치사회적 이슈를 소재로 위악적 낭만주의 내지 무협지와 같은 저급한 (것으로 여겨지는) 문법으로 풀어낸 것처럼, 작가는 롯데월드의 브로셔와 유하의 텍스트 사이로 관람자가 거닐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여기에 1전시실의 작업들과 같은 몰입성은 없다. 이곳은 매체의 이미지들이 전방위에서 인간에게 다가오는 공간, 인간이 군데로 시선을 집중할 필요가 없는 공간이다. 관람자의 동선은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을 중심으로 원형이 것이다.

아니, 집중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매체성이 공간을 완전히 잠식한 <롯데월드 II>에서 작가의 시선은 중앙에서 회전하는 영사기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반면 <광고 발칸포>에서 회전하는 영사기는 오히려 밴담의 감시탑처럼, 소비자를 향한 상품 생산자의 시선이다. 같은 사각의 공간, 같은 영사 방식, 같은 부류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장치가 ‘보는 기능’과 ‘보여주는 기능’에 모두 대응될 있는 것이다. 만일 작가가 가지 기능을 선택할 있다면 (지금까지의 작업처럼) 기존 사물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조각가의 손길과 외부 세계에 대하여 셔터를 누르는 사진가의 손길이 합쳐진 작업을 지속할 있었을 것이다. 혹은 사물과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근거로 삼는다면 <롯데월드> 시리즈나 3김에 대한 풍자라는 <애국자 게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옷이 날개>, <배트남 관광> 이후로는 작품에 있어 바깥이 아닌 내재적인 표현에 집중하게 된다.

2전시실 후반부에는 고가구와 텔레비전과 결합된 작품이 자리하고 있다. 먼저 눈에 <Dancing stair>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대구와 같은 작품이다. 계단을 오르는 남자의 뒷모습을 포착한 영상이 반복적으로 출력되는 비디오, 그리고 비디오가 출력되는 브라운관들을 담고 있는 나무틀 역시 반복적으로 움직인다. 이미지의 성별이나 움직임의 방향 그리고 제목의 대상까지 뒤샹과 반대. 입체파 회화가 캔버스에서 정지된 장면이 아닌 사물의 움직임 혹은 시점의 변화를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제시했다면, 작가는 비디오와 가구들을 각각 복적으로 움직이게 하여 오히려 움직임을 정지된 상태로 인지되도록 묶어버렸다. 말하자면, 누군가 기차에 타고 있을 처음에서 마지막 열차로 이동한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기차 안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나아가, 그가 움직인 만큼 기차가 반대방향으로 움직인다면, 그는 여전히 제자리에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과정이 패턴화된다면 움직임이란 실상 고정되기 위한 관성처럼 작용하므로 변화하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게 된다.

뒤샹이 카메라의 눈에 비친 신체를 캔버스에 옮겼다면, 작가는 미디어-기술 환경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고가구와 텔레비전이 결합된 모습으로 옮겼다. 방법으로 <가장>이나 <배회> 시리즈처럼 작가 자신을 반영했다고 여겨지는 작업도 가능할 것이다. 반영 대상을 넓혀 관료제나 산업사회의 일원으로 반복적 업무를 처리하는 모든 사람들을 비유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원래의 낡은 가구 내지 조립식 가구로 복원된 작품들은 외형적이고 기술적 측면에서 조악한 면이 보이기도 한다.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낡은 가구들은 (지금 보자면) 미디어-기술 환경에서 동떨어진 초기 산업시대의 인간-기계로 보이기도 한다. 초기 설정된 기능을 벗어나 텔레비전을 담고 있는 낡은 가구들을 보며 향수와 같은 감정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카프카의 <유형지에서>에서 등장하는 기계장치처럼, 기능은 이해할 없지만, 어쨌든 결함은 없는 기계장치에 대응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기계들에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3전시실의 작업들에서는 작가의 얼굴과 마주할 있다. 모든 작품들이 스크린의 빛으로 가시화되는 이곳은 외부의 빛이 차단된 암실이다. 수많은 고가구들이나, 하나를 독차지한 <파리애마>, <롯데월드> 시리즈에서도 작가는 관람자에게 작품의 이미지와 오브제, 그리고 그들을 연결하는 기계장치 등의 디테일을 있도록 했다. 그에 비하면 이곳은 초기의 상자 형태의 작품처럼 고정된 시점에서의 몰입을 의도한다. <터널>에서는 10m 길이의 어두운 터널로 들어가게 된다. 기차소리가 들린다. 반대편 스크린에서 희끄무레한 형체가 나타난다. 음량이 커질수록 가까워지는 형체는 작가의 흑백 이미지다. 음량이 최고조에 이르면 스크린의 이미지는 관람자와 일정 거리를 유지한 부유하고 있다. 서서히 음량이 작아지면서 형체는 멀리 사라진다. <튜브> 작품의 미니어처 격인데, 기차소리와 움직임을 동기화시킨 알루미늄 재질의 터널 너머의 스크린으로 작가의 모습이 나타난다. 터널의 흔들림이 최고조에 이를 작가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 마무리된다. 마치 관람자가 작가의 이미지에 눈으로 달려드는 느낌인데, 실상 관람자의 위치를 따져본다면,  <터널>이 작품 안이라면 <튜브>는 작품 밖이다. 


이러한 몰입성은 스크린의 출력에서 관람자의 눈으로 입력되는 시선 이전에 스크린을 조종하는 물리적인 힘이라는 조건을 통해 발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터널>에서는 기차소리, <튜브>에서는 진동, <>에서는 작가의 호흡과 같은 것들에 따라 스크린 작가의 이미지는 크기가 변형되고, 회전하고, 위치가 이동된다. 스크린 속 작가 자신의 변화를 알지 못한다. 더빙된 영화배우의 입술처럼 어색함이 있다. 기술적으로 세련되지 않아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미지들은 출력될 장소를 염두에 두고 촬영되었다거나, 리얼리티를 따라잡을 목적으로 데이터 차원에서 조작된 것은 아니다. (현재 보기에는) 일견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작가의 작업들에는 기술-미디어가 인간-이미지를 통제한다는 측면이 부각된다. 그런 점에서 <시계>와 같은 작품은 매력적이다. 카메라 옵스큐라의 힘이 괘종시계로 재매개된 형태로서 말이다.

백남준은 자석 하나로 텔레비전을 해킹하는 법을 보여주었지만, 우리는 하드디스크에 자석이 닿으면 망가진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기술로 사물을 분해하여 데이터로 저장하고, 인간의 동작을 분해하여 하나씩 버튼으로 지정하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그렇게 데이터로 보이는 세계를 바꾸려면 기술이 발전한만큼  복잡한 무엇인가를 손에 들어야 것이다.

작가의 눈에 비친 세계는 데이터가 아니었다. 작가에게 매체는, 스크린은, 텔레비전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또한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이기도 했다. 낡은 가구들은 비단 기술-미디어 문화 이전 생활양식을 지시하는 상징물로써 제시된 것이 아니라, 인간 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 속 또다른 공간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가구였던 것이 당시에는 텔레비전이었고, 지금은 스마트폰 등이 된 것이다. 그 공간에 작가는 추상적인 개념부터 일상적인 사물, 사람의 욕망에서 거대자본의 판타지까지 집어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도.

이 광경이 공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폴터가이스트 현상처럼, 텔레비전으로 전염되는 링 바이러스처럼, 3전시실의 작업들에서 부각되는 인간-이미지를 통제하는 힘으로 작용한다면 충분히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런데 다르게 본다면 어떨까. 홀로 움직이는 낡은 가구, 제자리를 맴도는 누군가를 보여주는 텔레비전, 3전시실의 기계장치 속에서 부유하는 이미지, 그들을 인간의 소리를 표현하지 못하는 기계들이 무엇인가를 인간에게 전달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한가.

작가의 후기 작업에는 어느 쪽이든, 보는 입장이든 보여지는 입장이든, 순응하는 입장이거나 저항하는 입장이거나, 기원도 출구도 불확실한 굴레의 공간이 있다. 그 장소가 이 글 첫머리 안타까움의 근원지로, 사방이 막힌 벽에 흐르고 있던 누군가 끝없이 걷고 있는 이미지, 그 이미지를 제자리에서 회전하며 끝없이 영사하는 기계장치, 그리고 녹음된 누군가의 숨소리가 영사기의 모터에서 들리는 것만 같은 아찔함 속에서 그 이미지를 따라 걷게 되는 <보행자>의 공간이다.

그런데 그 '안타까움'은 무엇을 위한 감정인가. 인간? 기계? 인간의 얼굴을 빌려 움직이는 텔레비전을 위함인가, 텔레비전에 빙의된 것처럼 보이는 인간을 위함인가. 이 글은 그 감정에 이르는 과정을 복기했으나, 그 이후를 선택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다른 장면을 상상하는 것은 가능하다. <거울> 속 소년이 성장하여 <거울>을 마주하는 장면이다. 분명 소년과 <거울>은 서로의 닮은 부분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장면 이후의 상황을 서술하는 몫은 작가나 이 글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