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미디어아트 전시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_exhibition review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4. 20.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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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은 체스를 좋아했다. 그의 작업은 당대 예술계를 향한 체크메이트였다. 그의 이후로, 물화되지 않은 작업착상을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예술가들이 등장했다. 혹은 작품의 관람 이상으로, 작품에 참여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여겼던 예술가들도 있었다. 
게임과 예술은 현실에서 벗어난 현실이라는 점에서는 닮았다. 게임을 하거나 예술작품을 경험하는 것은 생산적인 일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문화의 범주에서 둘의 처우는 다르다. 예술은 여러 학문에 관계를 맺는 고급문화에 속하지만, 여전히 게임은 하위문화로 여겨진다.
우리나라에 PC 보급률이 급격하게 증가하던 와중에 함께 쏟아져 나오던 컴퓨터 입문서에는 당시 유명하던 DOS 게임이 꼭 들어가 있었다. 게임은 컴퓨터와 친해지기 좋은 수단이었다. 게임의 그러한 기능은 지금도 유효하다. 또한 현재의 컴퓨터는 점점 작아지고 얇아지면서 전화 기능까지 흡수해버렸다. SNS와 게임이 결합하고, 산업적으로 경쟁하는 모습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기술을 통한 예술적 효과에 주목하는 미디어아트, 특히 작품의 관람자에서 사용자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경험'에서 예술적 효과를 발견하려는 인터랙션 작업에서도, '게임'은 최소한 인터페이스 범주에 있어서는 고전이라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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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Game+Interactive Media Art>(이하 정원) 전시는 지난해 12월 2일부터 올해 1월 9일까지의 1부와 3월 2일부터 4월 10일까지의 2부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이 전시의 제목은 보르헤스의 작품집, [픽션들]에 실린 단편소설 중 하나의 제목이기도 하다. 서구의 모더니즘 문학의 차원에서 보르헤스는 이야기 혹은 책의 매체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환상적 리얼리즘'의 기점이 된 작가로, 그가 즐겨 사용한 '환상'성은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의 대응격이 아니라 '주석'과 같이 텍스트에 삽입된 다른 층위의 텍스트를 통해 발생한다. '거짓 주석'이 삽입된 허구의 이야기, 다른 말로 하자면 유사-리얼리즘. 즉, 텍스트의 보존 기능이나 책이라는 매체의 복제가능성이 '이야기'에 미친 영향이 부각된다.
<정원>의 주요한 소재는, 등장인물의 선택행위-결과를 (마치 평행우주론의 공간에 있는 인물을 보듯) 총체적인 텍스트로 묘사하려는 시도에 대한 이야기이다. '게임'도 프로그램의 데이터베이스-규칙에 반응하는 유저의 선택을 통하여 진행되고, 각 유저마다 다른 경험의 판본이 만들어진다. 이와 같은 병렬적 상태를 묘사하는 방법 역시 다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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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전시에서는 아타리와 같은 초창기의 '전자오락기'로부터 최근의 엑박과 같은 고성능멀티미디어장치까지, 게임디바이스(+유명소프트웨어)를 위주로 게임산업에 대한 통시적인 변천사를 볼 수 있었다. 본체 뿐만 아니라 조이스틱 등 입력장치까지 함께 전시했고, 몇몇 기기는 직접 시연도 가능했다. 게임디바이스와 함께 전시하는 다른 작품들은 미술관 1층이나 계단 등 1부의 메인전시실 주변부에 배치되어 있었다. 바닥으로 향한 빔프로젝터가 만들어내는 수면 근처로 목제 다리를 놓은 공간, 자신의 모습이 촬영된 상을 조각난 거울을 통해 볼 수 있게 했던 계단 중간참의 상자, 촬영되면 자동으로 어느 웹사이트에 누적-게시되는 폴라로이드 카메라 등등의 작품들. 먼저 관람자가 '작품'이라고 인지하고 관찰하기 전에 작품이 '관람자'를 채집하여 결과물을 만들어 보여주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2부 전시는 당대 국내 작가들의 작업이 소개되었다. 먼저 관람자가 작품에 '참여자'로 개입해야 하는 방식이 강조되는 작품이 있었다. 먼저 김수정 작가의 <타나토노트>처럼 자전거바퀴라는 입력장치를 조작하여 스크린 상에서 방해물을 피해 오브젝트를 이동시키는, 단순화된 아케이드 게임과 같은 작업. 하태석 작가의 <미분생활 적분도시>는 그리드만 남은 심시티 게임과 같은 작업으로, 한쪽 벽면을 채운 스크린에는 사용자들이 입력한 정보를 토대로 가상의 도시가 구현되어 있다. 가상 도시의 데이터베이스가 시각화된 별도의 웹페이지가 존재한다.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으로도 참여 가능한 작품.

김기철, 변지훈. Two or One


감각의 전환을 강조된 작품도 있다. 김기철, 변지훈 작가의 공동작품 <둘 혹은 하나>는 소리-움직임, 혹은 움직임-소리의 전환을 형상화한 설치물이다. 해운대 지역의 풍량정보를 수신하여 새와 같은 형상의 날개짓을 조절한 작품과, 반복적인 움직임을 소리로 전환시키는 작품이 나란히 있었다. 김기철 작가의 <닿다>는 긴 직사각형의 단에서 좁은 변의 양끝에 놓인 마이크에 소리가 입력되면, 중앙에 놓인 두 꼭두각시 인형이 마치 서로 인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이다.
반면 감각이 전환되는 과정을 낯설게 만든 작품도 있다. 이현진 작가의 <물수제비던지기>는 닌텐도 눈차크를 돌맹이 삼아서 스크린 속 수면에 물수제비를 던지는 작품이다. 물리적 현실에서의 포즈가 이 작품에서는 힘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움직임의 변화가 아닌 특정 지점의 도달한 좌표로 인식하는듯. 한편 이지선 작가의 <The Dot>, <Head of Speech>는 불교의 면벽수행처럼 스크린의 응시를 통해 자아를 낯설게 한다는 경험의 계기가 될만한 비주얼을 보여주려 했다. 
관람자의 시각 정보를 교란하는 작업도 있다. 황주선 작가의 <교차하는>은 작품은 양편의 카메라+스크린 역할을 하는 부분을 관람자가 들여다보도록, 커튼을 쳐 놓은 형태이다. 안을 들여다 본 관람자는 스크린 한켠에 반대 방향의 커튼을 들춘 관람자의 (저장된)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시점에 존재하는 관람자가 대면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든 셈이다. 이상민 작가의 <Wave Reflection>은 플레이스테이션 콘트롤러를 조작하여 정면에 비친 관람자 스스로의 모습을 변형이 가능하도록 만든 작품이다. 콘트롤러 조작에 따라 사운드도 함께 변화한다는 설명이었는데, 관람 당일에는 작동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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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규칙과 목적은 뚜렷하다. 규칙을 알면 관전조차 재미있다. 물론, 사람들이 게임을 생각하면 처음 떠올리는 재미는 직접적인 참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경험이다. 그 경험에서 몰입성을 제외할 수 없을 것 같다. (몰입성 없이도 게임을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게임과 현실의 구별이 사라진 이후 아닐까?) 이 전시에는 사실 보르헤스의 '환상적 리얼리즘'적 공간은 없었다. 각 작품의 경험이나 의도에 내재된 수사학과 현실(언어)가 만나는 지점에서 게임의 서사적 특성이 반영된, 경험의 세이브-로드나 한 갈림길에서 복수 선택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공간은 전시를 회고하며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이 전시에 모인 작품의 대부분은 예술에서 관람자가 작품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으로 '게임' 기능이 삽입된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게임보다는 인터랙션에 방점을 찍은 셈이다. 또한 인터랙션의 조작감이나 투명성도 높지 않다. 작품을 통해 실재하는 현실과 동등한 경험을 하기보다는, 실재 현실과 작품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차이가 부각된 경험이며, 나아가 사용된 기술에 대하여 반성하는 계기가 되는 경험이다. 한편으로는 '작품에 대하여 반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인터랙션이 강조되어 약화된 기능성 때문이다. 어떤 작품에 어떤 기술이 쓰였는지 제대로 (조작할)알아볼 수 없거나, 어떤 기술이 너무나 단순하게 사용되어 버리면, 결국은 작품의 마감에 눈길이 간다. 그러한 작품들이 기술의 반성이 아니라, 기능의 반성을 의도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