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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미처 기대하지 못했던 관객의 반응과 맞닥뜨린 한 아티스트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이 ‘의도한 것’에 대해 어디까지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인지, 관객의 예상 밖의 이해를 수정해줘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워했다. 작가와 사적인 친밀도에 근거해 그의 과거 작품들을 접한 두터운 경험의 층을 갖고 있던 나는 그렇다고 과연 사전 지식이 없는 이들에 비해 내가 받아들이는 것이 작품을 더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라 확신할 수 있는 것일지 혼란스러웠다. 

그것이 어떤 텍스트이든지간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이를테면, 작가가 이 텍스트에서 의도한 것은 무엇인가? (혹은 작가를 지우고) 텍스트가 말하는 바는 무엇인가? 비평이 솟아나는 텍스트의 틈새에서 작가는 또 다음과 같이 묻는다. 나는 어디까지 나의 작품을 변호할 수 있는가, 혹은 해야 하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작품은 나와 별개의 개체인가? 

이런 질문들이 쏟아져 내리는 혼돈의 장에서 나는 에코의 이름을 떠올렸다. 매일 새로운 형태의 작품들이 역시 낯선 기술과 접목되어 잉태되는 공간에서 도대체 어떤 해석을 해(내)야 할지 자문했던 적이 있는가? 움베르트 에코(Umberto Eco)의 책 ‘작가와 텍스트 사이’는 우리에게 텍스트를 대하는 여러 가지 관점을 보여준다. 이 책은 1990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클레어 홀에서 열린 태너(Tanner)강연회에서의 에코의 강연, 토론자들(리처드 로티Richard Rorty, 조너선 컬러Tonathan Culler, 크리스틴 브루크로즈Cristine Brook-Rose)의 글, 그리고 에코의 답변을 수록하고 있다. 

 ‘장미의 이름’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에코의 약력을 보더라도 이 텍스트에서 빈번히 들고 있는 예시가 문학작품일 것이라는 것은 쉽게 예측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디어아트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과 문학작품의 해석에 관한 논의를 참고하는 일에는 어떤 종류의 상동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첫 문단에서 밝혔다시피, 하나의 텍스트가 있고, 그것을 생산해낸 경험적 작가가 있으며, 이를 읽어내는 독자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작품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읽어내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독자의 역할로, 해석의 가능성 역시 무한히 열려있다.’ 이와 같은 독해 방식은 텍스트의 장르를 막론하고 일종의 미덕으로 받아들여져 오늘날 독자에게 비평에 관한 모든 권위를 이양한 것처럼 보였다. 난해하고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작품 앞에 서서, 독자는 오늘도 그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노력한다. ‘작가가 무엇을 의도했든,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용하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에코는 이와 같은 실용주의적 관점에 강하게 반발한다. 그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작품의 의도’이다. 

 ‘작품의 의도’는 ‘작가의 의도’와 별개의 것으로, 텍스트가 작가의 손을 떠난 이후 텍스트 내재적으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이에 속한다. 에코의 이러한 언급은 작품에 대한 초해석 내지는 무한 해석에 대한 비판이며, 그는 작품이 만들어내는 의도가 그것을 읽어내는 관객의 해석 범위에 제한을 가한다고 본다. 뭔가 심오하고, 의미심장하고, 신비로운 것들이야말로 본질적이고 진리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은 2세기의 연금술사들만이 저지르는 오류는 아니다. 작품 앞에서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리며 분명히 있을 것만 같은 (혹은 있어야만 하는) 숨은 메시지를 찾아내려는 모든 관객들은 자신의 비평을 일갈할 수 있는 자신만의 웹페이지를 손에 넣음으로써 자신에게 부여된 초해석의 권위를 매시간 행사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일까? 이 시대에 틀린 해석은 도대체 없는 것이며, 텍스트는 독자하기 나름이란 말인가?

이 책이 작가와 텍스트 사이의 관계를 명확하게 밝히거나 텍스트를 읽는 최선의 방법을 제시해 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면 미리 밝히건대, 그렇지 않다. 그러나 당신이 이 책을 통해 텍스트를 대하는 여러 가지 관점과 조우하고, 그 사고를 심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텍스트에 대한 초해석에 반대하는 에코, 인간이 무엇을 하는 것은 단지 그것을 이용하기 위함이라며 실용주의자를 자처하는 리처드 로티, 텍스트가 작용하는 방식에 대한 이론적 성찰을 오히려 심화해야한다는 조너선 컬러, 그리고 영화와 TV의 시대에 소설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양피지의 역사’라고 역설한 브루크로즈의 입장(소설의 자리에 다른 장르를 넣어서 질문을 만들어보라. 이들의 질문 방식은 하나의 틀을 제시할 뿐이다.)을 압축적으로 만날 수 있다.    

부작용이 있다면, 만에 하나 확고했을지 모를 텍스트 독해에 대한 당신의 입장에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혼돈의 가능성을 감안한다면, 당신은 분명 작가로서, 비평가로서, 혹은 독자로서, 각기 다른 어떤 위치에서 위안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텍스트를 만들어낸 경험적 아티스트와 텍스트 자체가 생산해낸 전략적 아티스트, 그 사이에 존재하는 문턱의 작가(the Author on the Threshold)를 만나보자. 


*1997년 열린책들에서 번역된 ‘해석이란 무엇인가Interpretation and Overinterpretation’을 새롭게 펴낸 움베르트 에코 마니아 콜렉션 16권을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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