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미디어아트 전시

2012 서울미디어시티 <너에게 주문을 건다>: 테크노-주술사의 사보타주는 성공할 것인가 _exhibition review

yoo8965 2013. 1. 16. 18:47


마법단계의 잔재로서 예술이 지니는 마법적 성격은 탈마법화로 인해 직접적인 감각적 현재로서는 거부된다. 그러나 예술의 마법적 성격은 완전히 제거될 수 없다. 예술은 이러한 사실을 원동력으로 삼는다…마법자체도 현실적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한 일종의 계몽이다. 즉 마법의 가상은 탈마법화된 세계를 탈마법화한다.(아도르노)



0. 시대착오


2년 전 <2010 미디어시티>는 중요한 ‘혁신’을 감행했다. 오랫동안 쓰였던 공식명칭인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를 버리고, ‘미디어시티 서울’을 쓰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총감독 김선정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제시했다. 첫째 ‘매체예술’은 미술을 매체(재료)로 제한하며, 둘째 매체의 원래 의미는 광대하다. 다소 납득하기 어렵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매체의 일반적 의미로 돌아가, 정보를 전달하는 사회적 양상에 주목하겠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잡은 개념도 ‘TRUST’, 고색창연한 ‘신뢰’였다. 당연한 수순이었겠지만, 이 순간 <미디어시티>가 과거로 퇴행하는 것은 당연했다. 시대착오적 매체의식과 우편향적 예술관이 만난 ‘아름다운’ 결과였고, 즉자적인 거부를 통해서 안전한 퇴각로를 모색한 ‘사고’였다. 기술을 모태로 고원처럼 돌출한 매체예술을 현대미술의 계통수에 어떻게 분류하고 포섭할지 무력했던 것일까. 사실, 이러한 기술혁신의 피로는 얼마간 예견된 일이었다. 몰입, 상호작용, 가상현실 등등, 비엔날레가 기술박람회도 아니고 기술적 혁신을 수차례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태는 미덥지 못했을 공산도 크다. 물론 그렇다고 현재의 상황에 눈 감고, 시대착오행 열차에 탑승한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2012 미디어시티: 너에게 주문을 건다>의 총감독 유진상 역시 지금까지 개최된 미디어시티를 평가하며, 비슷한 진단을 내린다는 점이다. 매체예술이 기술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똑같이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김선정과 방식을 달리 한다. 두 명 다 매체예술을 다시금 규정하려고 하지만, 방점을 찍는 곳은 다르다. 김선정이 매체에 매달린다면, 유진상은 예술을 환기시킨다. 그런데 내세우는 개념이 사뭇 흥미롭다. 그렇다, ‘주문’이다.



1. 주문에 걸린 세계, 주문을 거는 예술


유진상은 세상이 주문에 걸려 있다고 생각한다. “기술은 세계를 바꿀 것이다. 사랑은 미디어가 되며 열정은 반복이 된다. 이 세계에서 시는 통계적인 조합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신은 통계를 지배한다.” 주문을 거는 신은 바로 기술이다. 기술을 신처럼 모시는 세상, 기술이 신처럼 세상을 바꾸는 시대, 주문에 갇혀 사는 인간, 결국 모든 게 기술로 매개된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이제 시작에 불과하며, 전례 없는 대규모 불확실성을 낳았다는 점이다. 게다가 디지털혁명과 신자유주의는 불안이 퍼지는 속도를 높였다. 추론으로 깨지지 않는 주문, 새로운 형태의 불확실성. 하지만 이 같은 벽 앞에서 유진상은 걱정하지 않는다. 주문을 깨고 불확실성을 걷어낼 전략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 역시 ‘주문’이란 것이다. “이 또 다른 주문(일종의 역주문)은 예기치 못한 만남, 작은 몸짓들 혹은 입맞춤 같은 사소한 행위들 속에 숨겨져 있다.” 하지만, 이 주문은 세상에 가상의 옷을 입혀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는 주문이 아니라, 주문을 깨는 주문이다. “예술가들은 새로운 주문을 만들어냈다.” 주문은 예술의 몫이란 것이다. 그래서 100년 전 활동한 전위대를 전근대적 ‘주술사’로 소환하며, 탈근대적 분열주체까지 동원하여 접합한다. 이 결과, 20세기 초반 시대의 상상력을 선도하며 사회의 변화를 앞당겼던 전위대는 21세기에 테크노-유목민 예술가로 재탄생하며, 뒤샹과 백남준은 이러한 예술가의 모델로 확립된다. 두 사람 모두 당시의 기술에 민감하게 반응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모범이란 것이다. 마치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처럼 말이다.


Seiko Mikami, <Eye-tracking Informatics>, PA system, 시선추적시스템, 2011



2. 세 개의 화두, 세 개의 전시


새롭게 규정된 주체와 변화된 전략을 마련한 다음, 유진상은 <2012 미디어시티>에서 세 가지 화두를 던진다. 첫째 기술환경의 변화는 어떠한 세상을 예견하는가. 그리고 예술가는 그러한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둘째 기술에 기초하는 매체예술은 무엇인가. 셋째 예술이 생각하는 미래는 어떠한가. 이 세 가지 화두를 갈무리고 하고서, (상암의 DMC 홍보관을 제외하고) 전시를 3부로 구성한다. 1부 ‘미디어극장: 모두 다 잘 될거야’는 매체가 현실을 매개하는 바람에 현실 역시 무대로 변화는 현상을 주목한다.(존재론) 일찍이 휴대용 카메라가 등장했을 때 손탁이 분석했던 대로, 현실은 무대로 바뀐 지 오래다. 모든 사람이 사진기를 들고서 현실을 무대로 삼기 때문이다. 휴대용 카메라를 능가하는 오늘날의 매체환경이라면 상황은 더욱 배가될 수밖에 없다. “양은 질로 전환된다.”(벤야민) 로베르 르파주, 사라 켄더라인, 제프리 쇼, 세 명의 <파편화>가 대표적인 작업일 것이다. 2부 ‘천 개의 주문들: 알려지지 않은 친구들의 윤회에 대하여’는 요즘 유행하는 사회인맥형서비스SNS를 비롯해 여러 유형의 인터넷서비스에 주목하는 작업을 선보인다.(사회학)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대로 이 같은 매체들은 새로운 공동체와 소통을 창출했다며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 내부가 블랙박스란 것이다. 방&리의 <FAQ>와 <Lost in Translation>이 대표적인 작업이다. 3부 ‘혼선: 보이지 않지만 안녕’은 매체의 뒷면을 들춰낸다.(매체론) 매체는 투명성을 주장하나,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 정체를 드러낸다. 바로 혼선과 잡음이 발생할 때다. 투명하기만 했던 매체가 자신의 (불투명한) 존재를 불현 듯 드러내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작업들 가운데 료지 이케다의 <자료행렬 >이 특히 흥미로웠다. 이 작업은 실시간을 자료를 처리하여 10개의 화면에 출력하는 형태며, 영상이 바뀔 때마다 몰개성적인 기계음을 내뱉는다. 그런데 가만히 작업을 보면, 영상도 소리도 무엇인가 드러내기 위해서 출력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중간에 단절될 때 일순간 드러나는 부재를 강력하게 환기하기 때문이다.



Ryota Kuwakubo, <The Tenth Sentiment>, N gauge Rail and Train, Various daily objects, 2011



3. 현대미술과 매체예술의 화해


전시는 세 가지 화두를 각각의 부문에 할당하진 않았고, 화두를 만족하는 작업을 부문의 주제에 골고루 분배했다. 이렇게 <2012 미디어시티>는 ‘세계의 첨예한 현재성’을 내걸었던 만큼, 매체예술은 예술 본연의 기능을 되찾은 것처럼 보인다. 기술적 혁신이 엿보이는 작업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매체가 매개하는 ‘현재’를 탐색하고자 하는 작업이 다수를 차지하며, 전시를 구성했다. 특히, 세이코 미카미의 <시선추적 기술>은 범례적인 작업이다. 첨단기술을 사용하여 시각적 무의식을 탐색하는 작업으로, ‘본다’와 ‘본다고 생각한다’를 시각적으로 통합한다. 기술적 형식과 성찰적 내용을 모두 만족하는 작업으로 볼만하다. 하지만, 목에 못내 걸리는 작업도 있었다. <2010 미디어시티>에서 노순택의 작업을 보고서 충격을 받았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료타 쿠와타보의 설치작업 <10번째 감상>이나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싱글채널 비디오 <예술은 아름다워야 한다/예술가는 아름다워야 한다>나 데이비드 클레어바우트의 스틸사진 영상작업 <알제의 행복한 순간의 단면들>은 보는 순간 여느 비엔날레에 온 듯 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비엔날레에 등장하는 작업 모두가 완벽히 주제를 만족하기는 힘들며, 어느 정도 불협화음은 발생할 수밖에 없기는 하다. 하지만, 문제는 단순한 ‘잡음’ 정도로 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김선정이 했던 것처럼 ‘매체예술’을 아예 지워도 무방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 볼수록 예견된 결과였다. “미디어 환경의 진보에 상응하는 ‘기술 중심’의 미디어아트, 그리고 사회적 문화적 이슈를 다루는 현대미술이 현재는 따로 분리되어 있어요.”(<art in culture> 2011년 11월호) 현대미술과 매체예술을 화해시키는 게 유진상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매체예술의 기원을 전위대로 귀속시켰고, 뒤샹과 백남준을 매체예술가의 시조와 전형으로 삼았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앞서 제시한 주제를 만족하면, 20세기의 기술적 매체를 사용하면, 매체예술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사진이라 할 지라도 말이다. 이렇게 보면, 유진상은 김선정보다 더 멀리 가는 셈이다.


Marina Abramovic, <Art Must Be Beautiful / Artist Must Be Beautiful>, 퍼포먼스 기록비디오, 1975



4. 주문과 마법


사실, 유진상의 ‘주문’을 ‘마법’으로 바꾸면 정확히 아도르노의 미학으로 번역된다. 아도르노는 일치감치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첫째 한때 마법이었던 예술은 현재 마법이 사라진 세계에서 거부될 수밖에 없다. 둘째 마법의 잔재는 완벽하게 사라지진 못하며, 예술은 그러한 잔재를 동력으로 삼아서 합리화된 세계를 비판한다. 셋째 합리화된 세계는 마법이 사라졌다고 주장하지만, 그 역시 또 다른 주문에 사로잡힌 세계라면, 예술의 가상은 그 주문을 해제할 것이다. 아마, 예술만이 가능할 것이다. ‘주문을 깨는 주문’은 거짓을 고백하는 마법이며, 결국 계몽이다. 현재의 세계가 기술의 주문에 걸려 미망에 빠졌다면, (기술적 혹은 전자적) 매체예술이 적임자라고 얘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2012 미디어시티>는 ‘합리화’ 대신에 ‘기술’을 바꿔쳤을 따름이다. 어쨌든,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매체예술의 안전한 좌석은 마련된 셈이며, 옛날 전위대의 (매체)예술이 그랬듯 오늘날 테크노주술사의 매체예술도 제도로서 확립된다. 안전하게 집을 짓고 사는 쪽으로 선회한 것이다. 들뢰즈의 분열주체를 끌어오며 탈근대의 기술로 색칠하지만, 과거의 모더니즘으로 착색(귀환)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앞서 지적한 ‘잡음’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면, 이 때문일 것이다. 대가는 확실히 따랐다. 매체기술과 관련된 모든 현상을 포괄하면서, 매체예술의 외연이 엄청나게 넓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이 시대의 미디어아트는 그 ‘경계가 없는’ 미디어테크놀러지와 관계하는 모든 창의적인 활동이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최두은)



David Claerbout, <The Algiers’ Sections of a Happy Moment>,Single channel video projection, black and white, 37' 12", 2008



5. 기술의 존재, 기술의 의식, 기술의 표현


예술에서 기술의 존재와 기술의 의식은 구별된다. 그리고 예술로 기술의 의식을 표현한 것 또한 구별되며, 과거의 기술적 매체와 현재의 전자적 매체 역시 구별된다. 뒤샹과 백남준이 각기의 시대에서 새로운 기술적 매체로 시대와 적극적으로 교전했던 것은 맞다. 하지만 각자의 의식과 수준은 매우 달랐다. 백남준이 ‘사이버네틱예술Cybernated Art’을 선언하며 기술적 매체가 세계에 침투하는 양상을 기술적 매체로 대항했던 반면에, 뒤샹과 이탈리아 미래주의가 그만한 기술적 의식까지 담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들은 매체를 사용하는 목적이 백남준과 달랐다. 예술적 제도나 사회적 제도를 파괴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은 경우였다. 특히나 후자는 아예 전쟁에서 예술을 구할 정도였다. “전쟁은 아름답다…새로운 시, 새로운 조형예술을 위한 그대들의 투쟁이 이들 전쟁미학의 근본원리에 의해서 분명하게 밝혀질 수 있기를!”(마리네티) 더구나 그때와 지금은 매체지형이 완전히 판이하며, 그곳에 던져진 작가의 운명도 다르다.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마노비치가 ‘새매체’와 ‘구매체’를 구별했던 이유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수적 재현, 모듈성, 가변성, 자동화, 약호변환 등등, 사람들에 따라서 의견이 엇갈리는 속성이 있을지는 몰라도, 기술적 매체와 전자적 매체를 등가로 간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6. 후위대와 실패한 기획


물론, 모더니즘적 기획과 주체를 다시금 요청하는 의미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개념을 통해서 세계를 재현하는 대규모 기획전은 쇠퇴하고, 신자유주의를 등에 업고 장식경향이 날이 갈수록 강력하게 예술계 내부를 침투하는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 쯤 생각했을 것이다. 이 같은 처지는 매체예술도 예외는 아니며, 어쩌면 전통적 장르보다 훨씬 더 노골적일 수 있다. 매체예술의 속성상 일정한 장치를 요구하고, 합리적인 생산방식을 따르며, 조직적인 생산단위(프로젝트)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어떤 장르보다 자본을 요구하는 경향이 짙다. 실제로도 장식을 자처하며 빈약한 내용을 감각적 볼거리로 돌파하는 상황은 현재 가파르게 진행된 상태다. 노골적으로 건물의 외벽을 장식하는 장치로 전락한 미디어파사드를 생각해 보라. 하지만 그렇다고 안전을 보장한 제도로 투항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생명을 연장하는 안전한 방법일 지는 몰라도, 상황을 안이하게 인식하는 태도다. 그리고 작가가 근대적 주체의 모델인 것은 맞다. 여전히 혼자서 외롭게 세계와 대면하며, 세상의 감각적 변화를 감지하는 존재다. 그러나 상황은 100년 전과 같지 않다. 그때는 전위에서 세상과 매체의 변화를 선취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후위에서 기술적 변화를 쫓아가기에도 급급한 상태며, 예술계 외부라면 모를까 구태여 그 안에서 잠재력을 찾을 필요도 없거니와 찾기도 힘들다. 하기야 그러한 테크노 유목민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제도로 일치감치 굳어버린 비엔날레로서는 그들의 잠재력을 포섭하기에 늙어버린 것일 지도 모르며, 폐쇄적인 미술관공간은 그들이 도주로를 찾기엔 알맞은 영토가 아닐 지도 모르겠다.



7. 매체가 매개하는 현실을 성찰하는 동시에 매체예술이 기존의 예술 개념과 제도를 평가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글. 김상우 (미학, 앨리스온 / newromancers@gmail.com)


* 본 글은 월간미술 12월호에 개재된 리뷰를 앨리스온에서 재편집하여 다시 개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