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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우의 과학・소설 읽기] 집행인의 귀향: 매체-인공지능-주체, 디지털 존재론_1부

yoo8965 2013. 10. 1. 19:47


로봇은 입력된 프로그램을 따라 특정한 작업을 수행하는 기계야. 행맨이 로봇과 다른 건 자기가 알아서 판단한다는 점이지…단지 정해진 프로그램을 따르는 기계가 아니었던 거지.

1. 생체정보를 포함해 모든 게 전산화된 미래. 주인공은 이름 없는 존재다. 자신의 의지로 네트의 세계에서 적극적인 망명자가 된 탓이다. “당시 나는 어떤 결단을 내렸고, 전자적 데이터로 이루어진 이 2차적인 세계의 시민권을 자동으로 받는 일이 없도록 미리 조치했다.” 그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 인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신원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 대규모 전산화 계획이 실현되기 전에 알던 사람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망명자 신세 덕분에 기묘하게 현실과 통하게 된다. “특수하고 민감한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어떤 인간으로든 변신할 수 있는 나라는 존재는 매우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카드로 치면 조커 같은 패라고 할까. 미묘한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 노릇을 하면 살아간다. 전자적 망명자라는 위치는 안성맞춤이었다. 망명자라도 살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고, 돈 역시 문제가 생기면 비합법의 존재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2. 여느 때와 똑같이 지내던 어느 날, 그는 술집에서 우연히 돈을 만났다. 그는 대형 사립탐정 사무소의 대표였고, 때때로 그를 고용했던 사람이었다. 돈은 사건을 직접 꺼내지 않고, 그의 과거와 지식을 넌지시 언급하며 외계행성 탐사계획을 그에게 탐문한다. 그는 금성 탐사계획을 설명하면서, 흥미로운 기계를 언급한다. 이른바 텔레팩터telefactor. 그것은 로봇일까. 아니다. 로봇은 사전에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라 특정한 과제를 수행하나, 텔레팩터는 그 같은 프로그램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운용되는 것일까. 멀리서 원격으로 사람이 조종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원격으로 조종가능한 전자적 ‘기계갑옷’에 가까우며, 인간의 정신을 담는 그릇으로 기능한다. 일종의 ‘매체’로 볼만한 것이다. 여기서 통제자는 흥미로운 경험을 한다고 그는 덧붙인다. 멀리 떨어진 채로 텔레팩터와 ‘교감’하는 과정에서 마치 자기가 경험하는 것처럼 느낀다는 것이다. 이러한 텔레팩터는 약점이 명확했다. 서로가 피드백하는 과정에서 시간적 ‘간격’이 발생한다는 것. 탐사과정에서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테지만 사소한 변화라도 발생하면 제대로 대처하기 무척 힘들 수밖에 없다. 물론, 행성의 여러 가지 환경자료를 축적하면서 예측모형을 정교하게 만드는 식으로 보완하기는 했지만, 이 역시 한계가 존재했다. 당연히 사람들은 생각했다. 멀리서 교신하느니, 아예 정신을 집어넣으면 어떨까. 여기서 인공지능의 문제가 등장한다. (그리고 덤으로 인간의 정체성까지.)

3. ‘인공지능’은 현대과학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분야다. 알다시피 인공지능은 20세기 초 두 명의 과학자의 공이 컸다. 튜링이 인공지능 모형을 추상적으로 고안했다면, 폰 노이만은 인공지능을 실제로 구현하는 현대적 컴퓨터모형을 설계했다. 적어도 계산만큼은 기술적 기계가 인간을 능가하게 되었고, 이른바 도구적 이성이 기계에게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튜링의 생각은 간단했다. 두 개의 방이 있는데 한쪽에는 사람이 한쪽에는 인공지능 기계가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튜링의 답변도 간단했다. 사람들이 질문하고 대화를 하면서, 사람과 기계를 분별하지 못하면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흥미로운 것은 실제로 구현도 됐다는 점이다.(1966년 요제프 바이첸바움Joseph Weizenbaum은 인공지능 상담사 엘리자를 만들어 병원에 설치해 놓았고, 환자들의 인기를 한 몸에 끌었다고 한다) 튜링이 구상을 담당했다면, 실현은 폰 노이만의 몫이었다. 중앙처리장치, 메모리, 저장장치, 입출력장치 등, 기술적 수준에서 한계가 있었을 뿐, 현대의 컴퓨터와 하등 다를 게 없었다. 이 고전적 컴퓨터는 2차 세계대전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던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였고, 맨해튼계획에도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다. 이때부터였다. 오랫동안 정신의 영역을 독점했던 철학이 자신의 자리를 빼앗긴 것은.  

4. 사실 징후는 일찌감치 나타났다. 근대철학의 기틀을 완성한 칸트는 철학의 편제를 주체를 중심으로 재편했다.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로서, 이 때문에 실재reality는 인식의 효과 정도로 전락했다. 물론 칸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인식과 실재는 동일한 논리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둘은 서로 대응한다고 생각했다. 이성의 하계 때문에 직접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다른 식으로 인식의 실마리를 마련한 셈이었다. 철학사의 측면에서 칸트의 해결책은 관념론의 발판으로 작용했고, 이후 유구한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정신을 설명할 때 언제나 유물론의 대척점에 섰다. 인간은 단순한 화합물 이상의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심드렁하게 반응한다. “컴퓨터 분야에서는 이 인공지능이라는 개념을 필요이상으로 논쟁적으로 받아들이는다는 것이 평소의 지론이다. 부분적으로는 의미론semantics에서 비롯된 문제이다. ‘지능intelligence’이라는 단어에는 온갖 종류의 비물질적인 연상이 따라붙기 때문이다.” 단순한 용어의 문제라는 것. 인간을 설명할 때 ‘정신’이나 ‘지능’ 같이 오해를 사기 딱 좋은 개념을 사용했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제 5원소 에테르처럼 말이다. 화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패러다임을 극복하기까지 장장 2천년이 필요했지만, 어쨌든 없애버리는 데 성공했다. 그랬기 때문에 주인공은 행맨의 문제를 오작동으로 생각한다. “너무 복잡했다고나 할까. 아마 그래서 고장났다고 생각하네.” 고장난 기계나 프로그램에 불과한 것이다.




글. 김상우 (앨리스온 편집위원, 미학)



* 2부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