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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준의 미디어문화비평] 5. 컨택트 (Arrival, 2016) : 미래를 기억하다

yoo8965 2017. 2. 28. 02:19



‘떠올리다'. ‘회상하다’ 등의, 기억에 따라붙는 술어는 기억이 과거의 지나간 사건을 지각의 흐름 속에 소급하는 행위임을 인식시킨다. 우리의 기억은 불완전한 동시에 불규칙적으로 소환된다. 이는 ‘기억’이란 프로세스가 인식 과정에 후행하기 때문이며, 선행되는 인식의 과정에서 이미 임의성과 자의성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식을 기반으로 하는 기억은 완전한 형태로 소환될 수 없으며, 그 과정 또한 규칙으로 묶어두기 어렵다. 만약, 이러한 과정을 보편적 흐름으로 귀결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인식과 기억을 지배하는 우리의 감성/감정과 충격에 대한 논의를 우선 진행해야 한다. 결국, 우리에게 기억이란 스스로의 내재적 규칙에 의거한, 따라서 타인이 보기에는 충분히 불규칙적 알고리즘으로 인식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과거의 사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다른 시제(현재 혹은 미래의)의 사건을 생각해본다 하더라도 사건이 선재한 이후 그 사건에 관한 사유가 후속됨을 이해하게 된다. 심지어 미래에 대한 사건의 경우에도 (아직 일어날 수 없는) 특정 사건을 이미 (상상을 통해) 전제하고 사건에 대한 사유가 진행된다. 

드니 뵐뢰브의 <컨텍트, Arrival>는 이렇듯 기억이라는 행위가 불규칙적이며 과거에 얽매일 수 밖에 없다는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다. 

물론, 이는 시간이 중력에 지배를 받는다는 상대성이론의 세 번째 예측에 기인하는 외계 생명체의 출현으로 가능해지는 영화적 요소지만, 이것이 제공하는 철학적 의문은 영화를 뛰어넘는다. 영화의 제목이 '도래(Arrival, 到來)'임을 떠올려보자면, 영화의(혹은 원작 소설로부터의) 의도는 보다 명확해진다. 만약 이것을 '도착(到着)’이라고 번역한다면 의미상의 착오로 볼 수 있다. 물론 영단어의 한자어 번역에 의존하는 문제이지만, ‘착(着)’의 의미가 ‘붙어있음’이기 때문에, 영화의 포스터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처럼(우주선이 착륙하지 않고, 약간의 거리를 띤 채 머물러 있음), 무언가가 다가올 것이란 의미를 내포한 ‘도래’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국내에서 붙인 영화의 제목(예전의 동명 영화와의 마케팅적 연결성 때문인지)에 관한 의견이 분분한데, 이 제목 또한 '접촉(Contact, 接觸)’으로 번역되기 때문에 사실 그리 적당한 제목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후 다시 언급하겠지만 시각 기표의 한계로서의 오감 영역으로의 접촉이라면, 그것은 그것대로 영화의 의미를 잘 읽은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도래한 외계인이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 행해지는가?


도래(到來)하는 것으로서의 외계 비행체는 지면에서 약간의 거리를 띄운채, 공중에 머물고 있다. 이는 완료된 현재도 아닌 아직 미래에 머물고 있는 모호한 정체현상으로서 인식된다. 지면에 착지해서 적극적으로 인간과 교류하는 것도 아니고 다시 우주로 혹은 자신의 행성으로 되돌아가지도 않는 이중적 상태가 지속되는 까닭이다. 그러기에 더욱 그들과의 소통이 절실해진다. 소통이란 행위가 다양한 매체들에 의해 구현되며 동시에 퇴색되고 있기에, 정말 소통하고 있는가?를 되묻고 있는 최근의 상황에서 외계 생명체는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할 소통의 필요성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든다. 언어학자인 루이스(에이미 아담스)가 영화의 주인공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만, 루이스가 영화 속에서 짊어져야 하는 무게는 다분히 통역사라는 수단적 차원을 넘어 외계인의 도래를 설명하고 후대에 그들의 기술을 전달하는 핵심적인 역할에까지 닿아 있기 때문에 그리 가볍지 않다. 또한, 자신의 삶 속 순간들을 영화 전체에 파편화시킴으로서 관객을 주인공의 연대기적 네러티브에 취하게 만드는 미끼 역할 또한 수행해야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주인공의 심리상태가 그리 밝지 않음의 원인을 딸 한나의 죽음 탓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시도는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결국 루이스의 (영화의 곳곳에 삽입된) 딸과의 기억은 아직 현재화되지 않은 미래의 기억이다. 굳이 문법적으로 보자면 미래 완료적 시제를 영화는 계속 유지하고 있는데, 주인공에게 딸은 ‘아직 오지 않았으나 원래 있던 것’의 존재로서, 해체주의자 데리다가 즐겨쓰는 표현처럼 ‘이미, 항상(Already, Always)’ 존재하고 있다. 영화 내용 중, 한나의 이름이 앞과 뒤의 철자가 같은 팔린드롬(Palindrome)의 형태(h-a-n-a-h)를 띄고 있음에 집중하는 대목이 보이는데, 이는 선형적 글쓰기가 지닌 순서의 일관적 흐름을 비틀어버리는 수사이다. 아직 오지 않은 딸은 루이스가 현재 시점에 존재하고 있기에 만날 수 없는 대상이지만, 이미 운명적으로 존재하는 잠재적 성격을 지닌다. 태어남과 성장, 죽음에 이르는 한나의 삶의 궤적이 온전히 루이스의 기억 속에 (혹은 기억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영화적 기법에) 녹아있는 것은 시간의 법칙에 지배받는 현재의 우리가 이러한 궤도에서 탈구함으로서 수평적 순환 관계를 획득할 수 있음을 짐작케 한다. 

다만 그 시발점이자 종착점이 중력의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렇기에 순환적 시간을 살고 있는 외계의 존재로 귀결되는 영화적 설정은(앞서 언급한 것처럼 과학적 원리에 기대고 있다 하더라도) 다소 무기력한 (혹은 무책임한) 결론처럼 느껴진다. 아직 우리의 과학적 접근이 또한 그 심도가 깊지 않음에 이를 논리적으로 풀어나가기엔 어쩔 수 없는 한계에 직면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토리의 주된 요소가 시간의 순환성에 치중하고 있음을 상기해보면, 외계 언어의 습득이 시간의 선형적 흐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열쇠가 된다는 결말은 이 작품이 상업 영화의 궤도 안에서 작동되고 있음을 그리고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 역시 (영화가 지닌 구조상의) 선형성을 벗어날 수 없음을 시사한다. 



또 한가지 영화의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외계인의 언어(기호) 체계이다. 이 영화는 영화적 상상력과 현실의 한계를 적절히 뒤섞고 있는데, 그들이 사용하는 기호가 선형적(lenear)이 아닌 순환적(circular) 체계라는 점에서 앞서의 시간성에 대한 문제의식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들의 기호 역시 기표(記標)와 기의(記意)가 구분되어 있다는 설정은 우리의 현실에 의존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들의 문자가 평면적 구조(혹은 차원)에서 벗어나 있음에도 결국 인간의 통계적 방식으로 기표가 지닌 나름의 기의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점은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우리의 기호 체계에서 기표와 기의의 연동은 수평적이지만, 선형적으로 진행되어왔기 때문에 그들의 순환적 기표체계를 해독하는 것은 문자 기호에 대하여 완전히 다른 이해와 접근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도달했던 기표(Offer Weapon)를 통해 언어의 모호성과 기호의 임의성을 지적하는 부분 또한 영화 속에 포함되어 있고 그들의 언어와 기호체계를 결국 해독하지 못한다면 영화가 직면해야할 관객의 반응은 절망스러웠을 것이란 현실적 이해도 가능하다. 영화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언어의 한계는 그것이 공시적(共時的, synchronic)일 수 없고 임의적이고 수평적이라는 데에 있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루이스가 직접 그들과 접촉하여 그들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초월적 종합의 장면은 다시 영화적 결말로 이해할 수 밖에 없는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낸다. 


SF(Sceince Fiction) 영화의 맺음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학적 상상력은 우리가 공유하는 지식에 기반한 흥미로운 전개로 관객을 이끌 수 있지만, 그것의 결과마저도 우리의 논리적 구조 속에서 파악되어야 하기 때문에 상상력은 결국 현실에 정박하거나 우리의 이해가 도달하지 못하는 미지의 무엇을 통해 해소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 속에서도 잘 만들어진 SF 영화는 존재해왔다. 현재의 과학-기술적 발견을 토대로 과거를 재해석하거나 미래에 관한 합리적 예견을 담은 영화가 그것이다. 거대한 스케일의 과학적 비젼이 제시되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을 반성적으로 사유해보게 만드는 작은 계기는 분명 이 영화에서도 발견된다. 다만, 그것이 우리의 사유를 어떻게 촉발시킬 수 있을지는 오로지 관객의 몫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