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미디어아트 전시

나를 잠식해버린 가면 뒤의 현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닌 것은 아니다 – Show Me Your Selfie_exhibition review

행복한 족제비 2019. 10. 28. 18:45

2019 7 17일부터 10 6일까지 고양아람누리 아람미술관에서 진행되는 전시 [Show Me Your Selfie] 전에서는 고양과 베를린 도시가 협력하여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8인의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을 엮었다. 행사 앞의 '영상 미디어아트 '이라는 부제에서 있듯이 영상작품이 전시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었다

 

2013년 11월, 옥스퍼드 대학 출판사는 2013년을 대표하는 올해의 단어로 ‘셀피(selfie)’를 선정하였다. 우리에게 셀카로 더 익숙한 셀피라는 단어는 자가 촬영 사진, self-portrait의 줄임말로, 2000년대 초반부터 쓰이기 시작하였으나 올해의 단어로 선정될 당시에는 전년에 비해 사용 횟수가 17,000% 늘어난 것으로 집계되었기 때문에 대표성을 확보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본 전시에서는 자가 촬영 사진의 의미와 함께나아가 자화상 또는 정체성이라는 의미 정도로 사용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Li Zhenhua, Unknown body, 2019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리전화(Li Zhenhua)의 <Unkown body> 보게 된다. 전면에 영상을 설치하고 후면에는 계란들이 잔뜩 올려져 있는 자음 ㄴ자 형태의 목공 목조물은 실은 작가 본인의 이름을 상기시키는 알파벳 L 모양으로 제작된 것이다. 영상에서는 개성이 느껴지지 않는 가면을 이가 천정이 높은 공간에서 부자연스럽게 끊어지는 움직임으로 때로는 숨기도 하고 때로는 무언가를 찾는 모습을 있다. 작가에 의해 주인을 잃은 그림자처럼 연출된 연약한 정체성 높은 천장을 가진 공간이 더해서 움직이는 모습에서 세상과 단절되어 있는 공허함과 적막감이 강하게 느껴진다. 파란색으로 덮여있는 구조물의 한 면은 흰색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는 가지런히 정렬된 투명 플라스틱 포장 안에 흰색 계란들이 놓여 있다. 중국에서 태어나 베를린, 취리히 그리고 베이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리전화가 작품에 오브제로 이용한 “계란”은 독일에서 정자들을 생성하는 남성의 고환을 상징한다. 리전화의 L 놓여 있는 계란은 원래의 목적 또는 기능이었던 생명력은 단절되었지만, 작품을 통하여 또 다른 존재로서 그 상징을 대표한다. 관람객은 가장 초기의 관념인 계란과 마주하게 된다. 거기서부터 알 수 없는 존재로 추상화되기 시작한 그들의 눈과 마음은 앞서 언급했던 주인을 잃은 그림자처럼 연출된 연약한 정체성으로 나타난다. 생물학적 목적과 가치의 상실은 형이상학적인 존재로서 변형되기 위한 절차일 뿐이다. <Unknown body>는 존재의 변형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화면에는 금방이라도 어딘가에 흡수되어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누군가의 유약한 자아(또는 정체성) 만이 자리할 뿐이다.

 

캔디스 브라이츠(Candice Breitz) <Profile> Variation A, B, C 세가지 영상으로 각각 별개로 전시장 내에 설치되어있다. <Profile> 출연하는 모든 이는 이름은 캔디스 브라이츠이다라는 문장을 말하는 것으로 독백을 시작한다. 그러나 영상에 작가 본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이부터 성별, 인종, 종교, 성적 취향 등 모든 것이 다른 이들이지만, 이들 모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작가들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자신의 이름을 캔디스 브라이츠라고 소개했다고 해서 캔디스 브라이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수단으로써의 이름일 본질적인 성향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Profile> 속에서 동료 작가들은 자신을 캔디스 브라이츠라는 허구를 통하여 또 다른 장르의 자화상을 형성하여 여러 배경에서 나온 다중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Warren Neidich, The Search Drive, 17min. 36sec., 2014

 

  구글링(Googling)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있는가? 구글링은구글로 검색하기라는 의미이다. 구글검색을 통해 자신의 이름, 이메일 또는 전화번호를 검색한다면 의외로 많은 검색 결과에 놀랄 것이다워렌 네이디치(Warren Neidich) <The Search Drive> 상에 작가 본인의 이름을 검색하고 검색해서 나온 링크를 클릭하고 이어지는 창들을 17분 간 스크린에 보여준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스스로가 만들어낸 조작된 자아가 있는가 하면 그 뒤편에서 수집된 정보에 의해 생성된 빅 데이터적 자아는 더욱 실체적이고 구체적인 현상으로 개개인을 조작하고 있다. 빅데이터는 대부분 거부감 없이 정보 제공이라는 차원에서 사용되며 효율성과 공신력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구축된 빅데이터 플랫폼이 누구를 위하여 정보를 제공하며 이들을 관리하고 정보량을 조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은 문제이다. 클라우드나 인터넷을 통한 신원 인식 및 정보의 공유는 시간에 대한 인식 없이 개인의 생체 및 행동 데이터를 모두 저장하며 구글, 유튜브, 아마존 등의 서비스가 자아를 더욱더 많이 알게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빅데이터적 자아는 실제로 존재하는 자아보다 실체적이고 구체적인 형상과 현상으로 조작 구축되며 신빙성을 주장하고 있다. 워렌 네이디치는 <The Search Drive> 통해 위와 같은 문제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며 정체성과 정체성 탐색의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탁영준, 무제(흩어진 과거), 가변크기, 2019

 

탁영준무제”(흩어진 과거) 고전적인 남성성과 일반적인 사회적 성공 혹은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자동차(또는 다른 공학적 사물)의 물질적, 상징적 일관성에 대해 던지는 질문이다. 작가는 기술적 대상을 조각의 모습으로 해체하여(조금 더 정확히 묘사한다면 차체 1대는 1,242개의 조각으로 절단되었다) 본래의 목적을 제거하고, 반짝이는 니켈로 도금하여 그 전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운 거울처럼 반들거리고 빛나는 미술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 굳이 현대자동차(Hyundai Moters)의 차체라고 강조된 근거를 작가 노트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현대자동차 전조등을 생산하는 공장에서 근무했던 부친과 그의 가족이 누릴 수 있었던 부의 축적은 마치 꾸준한 성장을 거듭해온 한국 근대 경제 성장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경제성장과 남성성이 맞물려 사회, 정치 전반에서는 개성은 무시되고 오직 주류의 가치 가시화되고 인정받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작가가 자동차의 묵중한 철골구조를 절단해봤더니 그것은 여러 겹의 얇은 철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소수가 덩어리로 전환되어 각각의 많은 특성은 대상으로만 지각되며 다양성은 성장이라는 사회적 욕구와 합의에 의해 국가 구조적 표면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전시장 바닥에 깔린 조각들은 분절적으로 이미지를 반사시키며, 전시장 곳곳과 보는 이의 주변을 비추어 보인다. 그렇게 왜곡된 이미지는 남성성의 고정된 전형을 강요하던 시대를, 그리고 생산 증대와 동일시된 성장의 시대를 산란시킨다. 이를 통해 정체성 구조 전체가 실은 손상되기 쉬움을 연출한 모범적 사례이다.

David Krippendorff, 아무것도 내 눈을 벗어날 수 없다.(Nothing Escapes My Eyes), 13min. 43sec., 2015 

데이비드 크리펜도르프(David Krippendorff)는 독일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성장한 유태계 미국인이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Nothing Escapes My Eyes>로 던지는 듯 하다. 작가는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에서 영감을 얻은 이 작품이 “문화적 정체성의 상실”을 가리키고 있음을 밝혔다. 자신의 모국인 이디오피아를 정복하여 자신을 노예로 전락시킨 이집트의 장군 라다메스와 서로 사랑하게 된 이디오피아의 공주가 겪는 문화적 정체성과 갈등, 욕망 묘사를 통해  정체성 개념 자체를 문제시해야 할 필요를 우리 눈앞에 제시한다. 영상 끝에 촬영 무대가 실은 극장의 분장실이 아니라 주차장이었으며, 주차장이기 이전에는 아이다가 초연된, 화재로 인해 소실된 이집트 카이로 오페라 하우스가 있던 자리임이 밝혀진다. 역사, 허구, 현실 그리고 정체성이 교차하고 있는 작품을 통해 정체성을 하나의 변환 가능한, 그리고 역사의 변천과 역사적 우연성에 매이는 구조로 본다

정연두, 높은 굽을 신은 소녀, 50min. 46sec., 2018

극동 아시아는 그들이 이룬 급속한 경제 성장 속에서이민이라는 현실적 문제를 대면하게 되었다. 2채널로 상영되면서 1958 23 홍콩에 밀입국한 작은 여성 씨와 2018년을 살아가는 작은 소녀들의 이야기는 각자의 이야기를 한다. 쉼없이 스크린을 오가는 이야기들은 딱히 서로 연결되는 지점을 찾기 힘들다. 키가 작은 23살이라는 사실 외에는 별다른 공통분모는 없는 듯하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재봉틀로 담담히, 진실되고 반듯하게 써내려 진다. 그와는 반대로 작은 소녀들의 이야기는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생기가 넘친다. 그들의 대화는 공간을 뛰어넘어 실현된다. 영상의 시작 시점은 서로 다르나 종료 시점은 일치하도록 맞춰져 있는 설정이 그 긴밀한 연결관계를 완성시킨다. 동질과 이질이 현재와 공간을 공유함으로써 분절된 연계를 하고 있다. <높은 굽을 신은 소녀> 통하여 정체성의 분열을 세대 간의 차이로서 보여준 정연두 작가의 연출은 나로 하여금 키작은 소녀들과 문 씨 할머니는 결국 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01
Nina E. Schönefeld, Dark Waters, 5min. 55sec., 2018

       

전시의 마지막에서 눈과 귀로 절망을 느꼈다. 해커들의 공격, 핵발전소 사고 등이 원인이 되어 모든 것이 파괴된 지구의 황폐화를 냉혹한 종말론적 미래의 비전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이번에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상영되는 니나 E. 숀네펠드(Nina E. Schönefeld) <다크워터스(Dark Waters), 스노우 폭스(Snow Fox), ...(L.E.O.P.A.R.T)> 3부작으로서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지구의 환경과 관련된 재앙에 저항하여 영웅의 역할을 하는 이들이 모두 할리우드식 남성 수퍼 히어로가 아니라 여성 전사들이라는 점이다. 작가는 기존의 영상 작업을 통해서 권력 구조의 지각 변동에 대하여 꾸준히 문제제기를 해왔다. 그녀의 입장에서 그 권력구조의 변동은 환경문제, 사회의 구조적 변화 그리고 (sexuality)적인 역할의 변화에서 출발한다. 우리 앞에 보여진 이 작품은 이러한 작가의 시각이 투영되어 변화된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과 생존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인간의 노력을 다루는 작품이었다.

 

가벼운 전시 제목이라고 생각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전시장을 찾았다. 주제를 되뇌일수록 주제를 일차원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은 나의 착오였기에 섣부른 판단을 한 나 자신을 책망했다. 진짜 주제는 ‘조작되어 만들어진 너의 껍데기으로서의 셀피가 아닌 ‘가면 안의 너의 진짜 모습이었던 것이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주제에 대한 예술적 접근법과 결과물에서 정말로 상이한 양상을 보인다. 리전화(Li Zhenhua)는 생물학적 목적과 가치를 상실하여 그 존재가 유약해진 정체성을 연출하였다. 캔디스 브라이츠(Candice Breitz)는 여러 배경에서 나온 다중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워렌 네이디치(Warren Neidich)는 불분명한 정보 관계와 같은 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며 정체성과 정체성 탐색의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탁영준은 기술적 대상을 조각의 모습으로 해체하여 본래의 목적을 제거함으로써 정체성 구조 전체가 사실상 손상되기 쉬움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데이비드 크리펜도르프(David Krippendorff)역사, 허구, 현실 그리고 정체성이 교차하고 있는 작품을 통해 정체성을 하나의 변환 가능한, 그리고 역사의 변천과 역사적 우연성에 매이는 구조로 보았다정연두는 세대 간의 차이로서 정체성의 분열을 보여주었다. 니나 E. 숀네펠드(Nina E. Schönefeld)는 모든 것이 파괴된 지구의 황폐화를 냉혹한 종말론적 미래의 비전으로 그렸다. 그들의 공통점은 모든 정체성의 주장이 갖는 취약성과 일관성 그리고 불확실성을 고집하는 것이다.

 

조성현 (aliceon editor)

 

2019. 9.30.

 

2019. 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