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미디어아트 전시

Video, Network, Curator, Asia_exhibition review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12. 11. 10:36


지난 몇 년 동안은 가히 국제교류의 해였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국제사업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제교류전시라고 하면 문화관광부 지정 ‘한국-000 교류의 해’에 맞추어 상대국가를 선정하고, ‘한-0 교류전’이라는 타이틀을 앞세운, 그것도 국가홍보관이나 대학교가 주최하는 다소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행사가 많은 수를 차지했었다. 그러나 비엔날레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네트워킹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등 국내외적 상황의 변화와 함께 점차 전문미술기관들이 특정한 주제와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기획하는 행사가 증가했고 많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미흡했던 점은 교류의 대부분이 일회성으로 그쳐 오랜 준비기간 동안 예산과 노력을 들여 일궈낸 네트워크가 유지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속적으로 교류를 지속해오는 단체, 또는 기관의 사업에 대해서 반가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대안공간 루프가 매년 개최하는 ‘Move on Asia’도 지속적으로 진행되는 국제교류행사 중 하나이다. 아시아 큐레이터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미디어아트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 행사는 AAF(Asia Art Forum)를 구성하고 있는 한국, 일본, 중국, 싱가폴 등 8개국의 젊은 큐레이터 17명이 매년 특정 주제를 발전시키고 각각 자국의 작가 2인씩을 추천하여 전시에 포함시키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여느 교류전시와는 달리 교류의 주체가 작가가 아닌 큐레이터라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며, 모임에 포함된 큐레이터들이 모두 현대미술의 최전방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라는 것도 관심을 끈다. 네트워킹을 강조하는 행사들은 보통 서로의 문화와 상황을 파악하고 행사의 내용적인 측면을 강화하기 위해 강연 또는 심포지엄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은데 ‘Move on Asia’에서도 매년 전시와 함께 비디오 아카이빙에 대한 포럼이 개최된다.



2004년과 2006년에 이어 올해 세 번째를 맞은 이번 전시는 ‘영상의 시각적 감수성과 테크놀로지’라는 다소 포괄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가져온 서정적 은유와 감정적 스펙터클이라는 새로운 시각성을 주목하고자 한 의도이다. 최근 이러한 디지털-아날로그, 이성-감성, 지각-감각이라는 서로 상반된 개념을 하나의 장에 녹여내려는 시도를 많이 발견한다. 일례로 올해 제52회 베니스 비엔날레는 ‘감각으로 생각하기-정신으로 느끼기’를 주제로 내세우며 이성과 감성의 화해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한동안 예술가들의 사회적 발언과 메시지가 중시되고 세계화, 자본주의 등의 거시적인 주제와 이슈들이 주로 거론되다가 이제는 다시 예술자체, 개인적인 순수한 예술적 감흥을 즐기고자 하는 시도가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듯한데, 이번 주제도 이러한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20여 개의 벽걸이 PDP와 헤드폰으로 디스플레이 된 전시장은 전시라기보다는 마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아카이브 같은 느낌을 주었다. 영상작품의 아카이빙이라는 포럼의 주제가 반영된 것으로도 보인다. 각 작품은 그 작가를 선정한 참여 큐레이터별로 나뉘어 상영되었으며, 옆에는 국가명과 함께 참여 큐레이터, 그가 선정한 작가와 작업의 제목이 기재되어 있었다. 사실 작업의 내용이 고려되지 않은 국가별 대항처럼 느껴져서 거부감이 들기도 했지만, 큐레이터들의 네트워크가 전시에서 중요한 부분인 만큼, 큐레이터별 작가군을 보여줌으로써 AAF을 구성하고 있는 각 큐레이터들의 시각과 성향을 드러내는 것도 흥미있었다. 또한 ‘아시아’라는 지역성을 전제로 한 행사로서 국가별로 접근하는 방법도 자연스럽다 할 수 있겠다.



Simon Maidment & Vikiki Mclnnes가 선정한 Silvana Mangano & Gabriella Mangano의 ‘If…so…Then’에서는 좁은 두 벽 사이에 서로를 보고 서있는 쌍둥이 자매의 모습이 보인다. 이들은 마치 거울 이미지와 같이 서로 비슷한 제스처를 리드미컬하게 반복하며, 상대방 머리 뒤에 있는 벽에 드로잉을 남긴다. 서로를 공격하는 듯, 또는 포옹하는 듯 그러나 무표정하게 계속되는 동작은 일견 동일하게 보이는 쌍둥이의 정체성, 상호관계성을 드러내주며, 신체와 이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과의 거리, 관계를 통해 심리적인 긴장감을 유발한다. Leng Lin이 선정한 Lu Chunsheng의 “History of Chemistry 1”은 난파된 배의 선장과 선원들의 이야기를 정적으로 연출된 장면들과 상징적 소재들을 사용하여 은유적이고 시적으로 풀어간다. 한 장면 한 장면은 독립된 사진작품과 같은 구성력과 밀도, 무게를 가지며 웅장한 음향과 함께 작품 전체를 장엄한 서사극과 같이 만든다. 함양아의 작품 ‘Land, Home, City’도 주목할 만하였다. 서로 다른 4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작품은 이동과 이에 따른 감정의 흐름, 정체성의 변화를 단순하지만 세련되게 보여준다. 서로 일치하지 않는 영상과 나래이션은 마치 누군가 걸어가거나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떠올린 생각을 엿듣는 듯한 은밀하고도 사색적인 느낌을 주며 스크린 밖의 공간으로까지 시선을 확장시킨다.



한편 작업 자체의 퀄리티와는 관계없이 서정성, 감수성이라는 전시의 주제와는 동떨어져 보이는 작품들도 눈에 띄었다. 종교간의 갈등과 전쟁을 이슈로 한 ALIMO의 애니메이션 “LEE ZO”나 돈을 깨끗하게 만드는 은행에 대한 풍자인 Ana Prvacki의 “Money Laundering TVC” 등 너무나 분명하고 강한 사회적, 정치적 발언을 골조로 하고 있는 몇 작품은 전시의 컨셉을 약화시킨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단일한 기획자가 작가를 선정하는 경우나, 한 명이 최종결정권을 가진 구조가 아닌, 동등한 위치를 가진 기획자들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전시이기 때문에 작품 선정에 있어서 조율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주제에 대한 조금 더 긴밀한 논의와 협력이 필요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디스플레이에 있어서는 스크린 수를 늘려 한 채널에 2~3편의 작품만 보여주고, 상영시간이 긴 작품은 별도로 분리해서 보여주는 노력이 돋보였다. 또한 각 스크린을 옮겨 다니며 이미 시작한 작품을 중간부터 보거나 처음 시작점을 기다리지 않고 모든 작품을 한 번에 다 볼 수 있도록 한 채널을 따로 분리했던 것도 실제 관람객의 입장을 배려한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럼에도 미흡한 점을 지적하자면, 각 화면과 화면 사이가 가까워서 헤드폰을 착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리가 섞인다는 점, 일부의 경우 서로 이웃하고 있는 작품들의 분위기가 상이하여 서로 어울리지 않고 관람의 흐름을 방해한다는 점 등을 들 수 있겠다. 또한 캡션과 인쇄물이 일치하지 않는다거나 오류나 중복이 있어서 급하게 전시를 준비한 느낌을 준다는 것도 아쉬웠다.



약간의 아쉬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시가 마음을 끄는 가장 큰 이유는 선정된 작품들의 퀄리티가 전반적으로 매우 높았다는 점이다. 작가의 스케줄 등의 상황에 비교적 영향을 덜 받는 싱글채널 비디오 전시라는 점은 작품 선정에 있어 보다 넓은 선택의 폭을 주었고, 무엇보다 자국의 미술에 정통한 각 큐레이터들이 각각 소수의 작가를 추천함으로써 숙고된 작품선정이 가능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네트워킹의 힘이라고 할 것이다. 네트워킹을 통해 조직되는 행사는 개별적인 전시의 경우보다 과정이 복잡한 경우가 많고, 추진력을 발휘하거나 일관되고 정확한 방향을 유지하는 측면에서 어려움이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양한 참여자들로 인해 구성의 다변화와 풍부한 정보 확보, 시너지효과를 추구할 수 있으며 상호간에 의미 있는 논의들을 발전시킬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한 번의 완벽한 행사가 아닌 지속적인 교류와 소통, 경험의 축적으로 얻을 수 있는 발전가능성과 장기적인 파급효과이다. 이것이 ‘Move on Asia’의 현재뿐 아니라 앞으로의 행보를 더욱 기대하게 하는 지점이다.

012345678910111213141516


글.박수현, 쌈지스페이스 큐레이터 parksh@ssamziespac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