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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국제 미디어아트 비엔날레 editor's note_aliceview

aliceon 2008. 10. 19. 09:38


가끔이지만, 아주 강렬한 꿈을 꿀 때가있다.
그것이 악몽이던 길몽이던, 잠에서 깨고나면 무엇엔가 홀린 듯 기운이 쭉 빠지게 되는 그런 꿈말이다.
[윤회-(리후이,중국)]를 보았을때가 그랬다. 무엇엔가 홀린듯. 강렬한 붉은빛이 내 영혼을 빨아들이듯 [숨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불빛이라기 보다는 알수없는 힘이  긴 실타레를 늘여뜨려 영혼을 잘게 흡입하고 있는 듯 했다.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하지만
진저리가 쳐지도록 집요하게.
그렇게 작가는 보는이의 영혼도 [승천] 시키고 있었다.
강렬하며 끈적한 빛의 흐름은 공간을 타고
흐르며 반복되며 [윤회]되어 진다.
인간이 죽음의 예행 연습인 [잠]을 통해 매일 부활 하듯이,
작품을 벗어난 내 영혼도 강렬한 꿈 뒤에 기지게를 펴듯 새로워졌다.

류임상 (앨리스온 아트디렉터)





전시장 층별 풍경 스케치

미디어 아트라는 영역 내부에는 굉장히 다양한 모습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회화라든지, 판화, 사진, 조각 등의 그들만의 독특하고 명확한 매체적, 시각적 특징을 가진 미술들과 다르게 고정, 혹은 움직이는 시각적 결과물 이외에도 청각이나 촉각 등의 다른 오감을 사용하게 하고, 여러가지 복합적인 매체 혼합의 모습을 보이며 기계, 컴퓨터 등 다양한 기기들을 이용하며 영화나 디자인 등의 영역을 넘나들며 우리가 알고 있는 경계를 혼란케 하고 전자공학, 정보학, 생물학, 지구과학, 물리학, 사회학 등 수많은 학문들과 결과물들을 종횡무진 교차시킵니다. 물론 개념미술이나 설치미술 등과 같이 앞서 언급한 모습들이 여러 가지 합쳐진 복합적이고 규정짓기 애매한 미술들도 있지만, 미디어 아트들은 미술 영역이 아닌 일반적인 디지털 기술과 그 사용의 영역, 즉 일상 및 현실과 뚜렷하게 겹쳐있기 때문에 더욱 애매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 중 가장 익숙하고 시각적 특성이 확연한 모습 한 가지를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스크린을 이용한 미디어아트가 그것입니다. 영화 스크린과 같은, 직사각형의 균일한 평면 위에 상영되는 비디오 아트부터, 관람자의 움직임 등의 데이터를 붇아 피드백을 보이는 작품, 그리고 정방형 평면이 아닌 공간 전체를 이용한 투영 작업 등 다양하게 분화되고 확장된 스크린 작품에 대한 몇 가지 작품들을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백남준의 예술, 우리가 일반적으로 미디어아트를 이야기할 때 떠올리는 예술, 바로 비디오 아트입니다. 여느 미디어 행사가 그렇듯, 이번 미디어 비엔날레에서도 상당한 수의 비디오 작품들이 초대되어 선보여 졌습니다. 회화같이 장방형의 2차원 평면에서 이미지가 보여지지만 회화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인 타임라인, 즉 시간이 부여된다는 점이 명확히 구분됩니다. 이 시간축이 들어감에 때라 시간축을 따라 이미지의 움직임이 표현되게 되어 고정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시각적 경험을 부여하게 됩니다. 이 점은 벤야민의 '무의식적 공간의 인지'로부터 시작해 수많은 미디어 이론가, 미학자들이 언급한 새로운 표현 영역입니다. 정연두의 <다큐멘터리 노스텔지어, 2007>이 대표적인 싱글 채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독특하게 세트장을 설치하고 해체하는 모습을 통해 꿈과 현실, 비현실과 현실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게 해 주는 이 작품은 고정된 이미지에서는 보여줄 수 없는 시각적 경험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함축되고 정제될 수 밖에 없는 회화등의 고정이미지들과는 다르게 '과정'을 보여주며 그 안에서 시간과 의식적, 무의식적인 이미지 모두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타카히로 마츠오의 작품<환상, 2007>입니다. 배치되어 있는 붉은 공을 가지고 흰 스크린 앞에서 그 공을 움직이면 그 동작에 따라 수많은 붉은 나비들이 스크린 전체를 수놓으며 환상적인 평면공간을 연출합니다. 일상에서는 결코 체험할 수 없는, 공상이나 환타지 세계에서나 가능할 법한 시각적 체험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작업입니다. 미디어 아트의 대표적 목적 중 하나인 -너무 일반적인 말이긴 하지만요^^;;-'새로운 미적 체험'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 예라 볼 수 있겠네요. 이렇듯 작품과 관람자 내부에서 일어나는 보이지 않는 상호작용과 혹은 작품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일방적 방향의 몰입이 아닌, 시각적인 피드백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노출되는 피드백 과정에서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미적인 체험이 발생하게 됩니다. 난해하고 특별한 의미나 심층구조가 없어도 충분히 멋진 작품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체험을 제공해 주네요^^.

마지막으로 살펴볼 작품은 피오 디아즈와 튜라 힐덴의 <극한의 열기, 2008>입니다. 회화 등의 매체에서 이미지가 보여지는 것은 대부분 평평한 '평면'에서였습니다. 이는 비디오 아트로 넘어오면서 역시 비슷한 모습을 보였지만 기술이 발전하고 꾸준히 새로운 시도가 벌어지면서 이러한 이미지 표현의 장소가 '평면'에서 '표면'으로 확장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 결과 내부 공간 전체, 혹은 외부 공간 전체에 이미지를 투영하는, 즉 표면에 이미지를 감싸 공간 전체를 작품으로 포함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 모습이 <극한의 열기>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관람자는 활활 불타오르는 동영상으로 가득 차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가 비치되어 있는 방석에 앉거나 누워 그 분위기를 즐기게 됩니다. 더더군다나 계절적 맥락과 맞아떨어져 참 푸근하고 따뜻하게 작품이 자아내는 분위기에 취해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작품들은 장소 특정성에 유연성이 있다는 점도 기존 매체 작업과 다른 점이라 볼 수 있겠네요. 조각이나 회화 등은 전시공간이 바뀌어도 작품의 맥락이 변하기 힘들며, 즉 장소에 따라 의미에 의해 전시될 수 있는 작품들에 대한 제약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미디어 작업들은 기술적 제약이나 어울림 자체에 대한 제약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 맥락이 크게 변해도 무리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이 작업은 문화역사적으로 기념비적인 건출물에 설치되어 불꽃이라는 이미지가 내포한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와 문명을 상징하는 건축물을 붕괴시킴으로써 그것이 영구히 존속하는 것이 아니며 역사의 흐름속에서 변화하고 생성됨을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시립미술관에 설치된 작업에서는 아무래도 그런 점을 느끼기 힘들겠죠. 장소에 따라 내용과 의미가 변한다는 것이 상관이 없습니다. 모더니즘 시대처럼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수용자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미니멀리즘 시대의 작품이나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중세 및 르네상스 시대의 여러 성당들, 구체적으로 성베드로 성당이나 시스티니 대성당처럼 내부 공간의 곳곳에 벽화를 그리고 조소 작업을 배치하여 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압도적 이미지를 만들어 낸 예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공간 작업이 다른 점은 특별한 내용이 없고, 선형적 스토리 라인이 없으며, 움직이는 이미지를 체험한다는 점이 다릅니다. 읽기 뿐 만 아니라 체험의 요소가 드러나게 됨이랄까요... 그에 따라 감상방법이나 시각 역시 달라졌고요.

미디어 아트는 다앙햔 새로운 이미지들을 만들어 냈고, 그들로부터 다양한 미적 체험을 새롭게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현대 미술 역시 그렇지만 미디어아트는 그 팔을 뻗은 범위가 더더욱 굉장히 광대해져서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미술인지 혼란스러운 그 경계를 더욱 일상과 접근시켜 버렸습니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다양성의 보존과 그 경계로부터의 새로운 충돌을 통해 또 다른 것을 만들어내기 위한 규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문제는 저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학자들과 작가들이 늘 그 점을 생각해 왔다는 점이겠지요. 하지만 늘 그것을 계속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어려운 문제겠죠.

허대찬 (앨리스온 에디터)



불길 속에 느껴지는 생성과 소멸......

올해 5회를 맞는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는 전환과 확장_빛,소통,시간 이라는 주제로 우리를 찾아왔다. 나에게 미디어비엔날레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무수한 가능성들을 계속해서 생성되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 미디어아트 모습을 꿋꿋하게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전환과 확장이라는 주제로 진행되고 있는 전시된 많은 작품들이 내 머릿속에 말풍선처럼 기억되어 있지만 특히 기억나는 작품을 떠올리자면 “Pio Diaz & Thyra Hilden 피오 디아즈와 튜라 힐덴”의 「극한의 열기」에 대한 나의 느낌은 너무나 강열했다. 비엔날레 행사가 오픈되기 전 공개된 홈페이지에 소개된 피오디아즈와 튜라힐덴의 작품 이미지는 나를 흥분시키며 그들에 홈페이지로 안내했다. 덴마크와 아르헨티나 출신인 그들은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문화역사적으로 기념적인 건축물(콜로세움,고대성당,트레비분수 등) 안을 화염에 휩싸인 듯한 거대하고 모든 것을 압도할 만한 상황으로 연출하고 있었다. 이미지로만 보아도 압도하는 화염의 힘이 느껴질 정도였고, 화염에 휩싸인 건축물을 바라보는 관람객들은 강한 어떤 힘을, 어쩌면 화염으로 휩싸인 유명한 건축을 보면서 허무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만약 저 건축물 안에 있다면, 아님 그 밖에서 건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어떤 건축물을 화염 속으로 넣을지 궁금증을 안고 찾아간 메인 전시장인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어떤 건축물 전체를 화염으로 휩싸이게 하지 않았다. 하얀색 동그란 공간_문화역사적, 기념적인 건축물은 아니 였지만_ 안을 화염 가득한 공간을 표현하고 있었다. 좁은 공간이긴 했지만 직접 그 공간 안으로 들어가 강열하게 타오르는 화염 속에 있으니 내 몸이 점점 뜨거워지는 듯한 느낌이 날 흥분시키는 것 같았다. 10분 넘게 그 공간에 있었던 나는 이 화염이 날 한줌에 재로 만들어버릴 것 같다는 두려움과 동시에 다시 내가 태어날 수 있을 것 같은 종교적이면서 관념적인 의미를 나도 모르게 나에게 부여하면서 공간 밖으로 나왔다.
모든것을 없애는 부정적인 뜻과 나쁜 것을 없애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긍정적인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불! 미디어아트가 탄생하기 전까지 단순히 시각으로만 불에 대한 느낌을 우리에게 전해졌다면 미디어아트가 새롭게 정립시킨 공간 속에 불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확대시키면서 온몸으로 불이 가진 힘을 받을 수 있었던 이 작업이 아마도 나에겐 이번 미디어비엔날레를 기억하게 하지 않을까 한다.

조채린(앨리스온 에디터)



전 순간적으로 그렇구나 라고, 혹은 한 10초쯤 들여다봐도 전혀 모르겠어 라고, 지나치고 싶은 사물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드라마가 있고, 음악이 있는 - 그걸 플로우라고 불러도 될까요 - 한 작품이 온오프될때까지 죽치고 지켜볼 수 있는 것들을 좋아해요.

시립미술관은 두번 갔었어요. 전체를 두번으로 나누어 봤는데 - 왜냐하면 최대한 한 작품이 있는 공간에 오래 머무르려다 보니깐
정신이랑 눈이 너무 지쳐서; 작업들이 다들 번쩍번쩍하니; 그렇다고 안내시스템이나 사전정보도 없이 그냥 부딪쳤기에- 그게 생생해서 좋거든요.

1층에서 본 [그림자 놀이]는 첫인상이 소위 말하는 프랑스 영화 같은 (누벨바그던가 - 그 중 하나 좋아했던 작품이 [나쁜 피]란 거였는데) 느낌이 나서 편하게 볼 수 있었어요.
그림자 놀이라면 보통 유희적이고 밝은 느낌을 갖지만 전 좀 그림자의 본질이나 이중성 같은 어두운 주제로 몰고 가는 경향이 있는데 -_-
작품은 서로 만나고 싶어하는 남녀의 스토리가 (역시 인간 내면의 양성성으로 볼 수도 있지만;) 연상되도록 진행되어서 호기심을 유지할 수 있었죠.
작품이 플레이되는 동안 흐르는 피아노 반주도 그림자의 동작이나 분위기에 적절하게 들렸고요.
또 보통 그림자 놀이하면 하얀 장막 뒤에 본체가 있거나, 커다란 스크린일 경우에는 빛 바로 앞에 본체가 있잖아요.
그런데 이 작품은 중앙에 하얀 장막을 걸어놓고, 하얀 장막의 양쪽으로 그림자들이 플레이 되지만- 장막 양쪽으로 반사각이 될만한 바닥의 위치에도 각각 그림자들이 보이거든요.
그건 네 개의 빔을 동시에 사용하는, 놀이에 있어서 룰 위반, 방식이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재미있게 느껴졌거든요.
그림자들의 액션들도 은근히 귀여웠고 (가령 기다리다 약간 지루해졌는지 발가락을 쫙 펴며 기지개? 하는 여자의 모습이 기억이 나네요)
남자와 여자가 만나지 않는다는 원칙을 제외하고는 그외의 소품들은 전부 스위치가 가능하거든요.
탁자, 의자. 와인, 글라스, 담배, 재털이... 나중에는 그래서,
(...어쩌면 그저, 서로 술을 몰래 마시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습니다. 단지 들키지 않기 위해 신경쓰는 사이...)
그 둘은 서로 전혀, 시간적으로도,  관계가 없는 사람들인데 단지 같은 공간에 존재하고 있다는 착각 때문에 어떤 이야기를 스스로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3층의 [진동]은 아주 짧게 봤지만 (그때 좀 지쳐있었어요;) 그래도 인상에 강하게 남아서 몇자 적어 봅니다.
공포영화 같았거든요.
롱테이크로 넓고 황폐한 배경 멀리 건물 같은 게 무너지고 다시 일어나고 그때마다 우르릉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립니다.
그리고 전혀 원근법 따위 신경쓰지 않는 사람(?) 형체들이 화면에서 사선으로 점점 다가옵니다.
안그래도 잡티 가득한 영상인데 그 형체들 속에는 악령에 빙의된 텔레비전처럼 혼잡한 무늬들이 진동합니다.
이 정도? 잠깐 봤습니다.
안그래도 전 진동이라는 키워드는 좋아하거든요.
제목은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게 물론 이렇게 글이 되도록 강화시키긴 했지만, 그냥 작품 자체의 이미지가 줬던 느낌으로도 인상 깊었어요.
음.. 실레의 그림이 좀 살이 쪘다고 해야하나? 베이컨의 그림을 애니메이트하면 그런 느낌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어젠가, 앨리스 모임 후에 만화책방에서 극락사과왕 찾다가 품절이어서 (...) 오츠이치의 GOTH를 집었거든요.
GOTH란 키워드를 듣고 나서, 지금 생각나는 건데, 꼭 그런 이토준지처럼 속눈썹 예쁜 얼굴과 9등신 몸만이 고쓰는 아니구나;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도 될 수 있구나, 라는 복선이 된 개인적 경험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너무 개인적인 취향이었나요;

김종혁(앨리스온 수습 에디터)



도시라는 거대한 복합체 안에서 우리 눈에 가장 많이 보이는 빛은 실내를 밝히는 조명이나 밤을 수놓는 가로등, 네온사인 등일 것이다.
이 인공의 빛들은 실질적인 목적을 이루는 것 외에도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풍경이 되거나
그 상징성을 통해 예술작품의 미디엄이 되면서 또 다른 역할을 갖게 되었다.
이번 미디어비엔날레에서도 형광등과 네온 등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이 소개되었다.

이토 아츠히로의 <무한방출>은 비엔날레 오프닝에서 퍼포먼스의 형태로 전시되었는데
나는 그가 ‘연주’하는 것이 ‘형광등’으로 만들어낸 무엇이라는 사실이 너무 신기해서 그걸 대체 어떻게 ‘연주’하고 있는 것인지를 관찰해보려 했다.
그는 마치 일렉 기타를 연주하듯 너무 자연스럽게 ‘그것’을 양손에 쥐어 잡고 손가락을 움직거리면서
발을 바닥에 놓인 이펙터(로 보였던)에 대었다 떼었다 하고 있었다.
형광램프 속을 채우고 있는 전기가 들끓다가 터지는 듯한 크고 거친 사운드가 발사되고 백색 빛이 번쩍거린다.
굉음에 가까운 기계적 사운드는 한밤 중의 질주하는 바이크처럼 우리의 신경을 자극한다.
본래 형광등은 무미건조하고 모든 것을 너무 적나라하게 보이도록 만들어 버리는, 실용적이지만 매력 없는 빛이었다면
그의 손에 들려있는 형광등은 매우 예민한 발광체이며 고집이 있는 놈이다.
퍼포먼스에서 느껴지는 거대도시 동경은 실제 내가 느껴본 그 곳보다도 더욱 차갑고 강렬하게 다가왔다.

카를로스 코로나스의 <어디에도 없는>은 높은 천정에서부터 3D공간을 활용해 여러가지 색의 '네온'을 겹겹이 설치해놓았다.
네온아트가 내용을 담은 글자나 특정한 형태를 선으로 그린 것처럼 재현하는 방식을 주로 취해온 것과 달리
일정한 길이의 네온들을 그대로 가져와 전체를 구성하면서 그 뼈대를 그대로 드러냈다.
그 모습이 일상에서 느끼는 네온사인에 대한 어수선한 느낌을 과장 시킨 것 같으면서도
다양한 색채의 빛들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이미지에서 네온의 물질성과 그 흔적을 지워버리고 그 너머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듯 했다.

선윤아 (앨리스온 수습 에디터)